1003. 서당에서 국화를 보니[九月二十九日 溪堂卽事]
冷雨寒烟暝一山, 園林蕭索菊花斑. 但知抵死芳香在, 不管風霜夜夜寒. |
찬비, 찬 안개에 온 산이 어둑한데, 쓸쓸한 동산에는 국화가 아롱졌네. 질 때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려 할 뿐, 밤마다 몰아치는 바람서리쯤이야. 냉우한연명일산, 원림소삭국화반. 단지저사방향재, 불관풍상야야한. |
이황(李滉·1501~1570) 계당에서의 즉흥시[九月二十九日 溪堂卽事] 『퇴계선생문집별집(退溪先生文集別集)』 권1 「시(詩)」 |
퇴계(退溪) 선생은 매화(梅花)와 사랑에 빠진 시인(詩人)이었다. 매화를 노래한 시집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따로 남겼을 정도니, 그의 마음속에서 매화는 단연 꽃 중의 꽃이었다. 그런 퇴계 선생이 느닷없이 국화(菊花)를 시로 읊었다니, 이건 무슨 일일까? 매화(梅花)에 비해 국화(菊花)를 주제로 한 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나마 지금까지 전해지는 국화 관련 시(詩)는 두 편. 하나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시(詩)고, 다른 하나는 「종국(種菊)」이라는 시(詩)다.
퇴계 선생이 매화 대신 국화에 시심(詩心)을 불태운 이유는 무엇일까? 명확한 이유는 남겨져 있지 않지만, 시기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시를 쓴 시점은 음력으로 9월 29일, 지금의 가을 말쯤 되는 시기다. 이맘때쯤이면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서 유독 다른 계절보다 더 쓸쓸하고 고독한 기운이 흐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피어난 국화(菊花)는 더 밝고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국화(菊花)가 단순히 예쁜 꽃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선인(先人)들이 국화와 소나무(松), 대나무(竹)를 군자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건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화는 늦가을 서리를 맞고도 홀로 피어나는 굳건한 꽃으로, 바로 이 모습이 굴하지 않는 절개를 지키는 군자(君子)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이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불렀다. 한자로 풀이하면 '서리에 굴하지 않는 외로운 절개'라는 멋진 표현이다.
국화는 서리(霜)를 맞고 피어난다는 점에서 소나무(松)와 대나무(竹)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사철 푸른 기개를 자랑하지만, 국화는 고독하고 차가운 늦가을에 피어 그 순간만큼은 더 눈부시게 빛난다. 퇴계 선생은 아마 이런 국화의 매력을 보고, 그 속에서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는 군자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현대 독자들은 이런 '국화 예찬'이 조금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꽃이 왜 서리를 맞고도 피어나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고, "서리를 견디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서리를 이긴다', '절개를 지킨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식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 선생 같은 노학자(老學者)가 이 시를 쓴 진정성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삶 전체가 학문과 이상을 실천하려는 투쟁의 연속이었기에, 국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상징물이었다.
퇴계 선생에게 국화는 그저 서리를 이기는 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세월과 맞닿은 어떤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나도 이 국화처럼 서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는 국화를 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퇴계 선생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매화를 사랑하던 그가 국화를 노래한 순간, 퇴계의 마음속에는 단순한 꽃 이상의 사색이 담겨 있었으리라. 물론, 매화만큼이나 국화에게도 잠시나마 눈길을 주었을 뿐이지만, 이 또한 그의 깊은 성찰과 연결된 순간이다. 국화를 통해 서리를 견디는 군자의 모습과 자신의 삶을 겹쳐 본 퇴계 선생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마 퇴계 선생이 국화빵을 보며 "이 국화는 서리를 맞아도 맛있군!"이라고 농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국화(菊花)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분명 진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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