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 신창 마을의 정취[新昌道中 신창도중]
蕎麥花開豆葉黃, 隔林山店隱西光. 堠人瞑立如相語, 棲鳥風翻還欲翔. 樹外牛鳴輸遠稼, 草間蛩響引新凉. 歸雲漏雨郊陰黑, 石逕羸驂傍夜忙. |
메밀꽃은 피어 있고 콩잎은 노랗고, 건너편 숲 주막에는 저녁 햇살 내려앉고. 장승은 그늘에 서서 말을 걸어오고, 새는 바람에 날려 도로 솟아오르고. 나무 곁의 소는 울며 볏단을 날라 오고, 풀밭의 귀뚜라미는 서늘한 바람 당겨온다. 가던 구름 빗줄기 뿌려 한쪽 들판 어둑하고, 돌길 걷는 지친 나귀 어둠 깔려 더 바쁘다. 교맥화개두엽황, 격림산점은서광. 후인명립여상어, 서조풍번환욕상. 수외우명수원가, 초간공향인신량. 귀운누우교음흑, 석경리참방야망. |
김욱(金熤·1723~1790) |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죽하(竹下) 김욱(金熤·1723~1790)은 젊은 시절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의 신창(新昌) 고을을 지나가며 가을의 풍경에 흠뻑 젖어 시(詩) 한 편을 지었다. 저녁 무렵의 들녘을 바라보며, 그의 시선은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고, 가을의 정취(情趣)가 마치 파도처럼 그의 감각을 적셨다.
김욱(金熤)은 그때의 풍경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뭐, 메밀꽃이 여기저기 핀 것은 기본이고, 콩잎이 노랗게 물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을이 참 깊었음을 깨닫는다. 산 아래 주막집에선 벌써 연기가 피어오르고,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은 아침부터 밤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러 가는 새들은 저 멀리서 날아가고, 한편으로는 볏단을 나르는 소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풀밭에서는 귀뚜라미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풍경에 아쉬움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나가는 구름이 잠시 멈추더니 몇 줄기 비를 뿌리고 간다. 김욱(金熤)은 이마저도 반가운 듯 받아들이며, 나귀마저 어둠이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서울내기임을 새삼 느낀다. 그는 가을 풍경 속에서 자신이 마치 그 일부가 된 듯, 서서히 감상에 빠져든다.
이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며, 김욱(金熤)은 자신도 이 고요한 가을의 한 조각이 된 기분을 느꼈다. 메밀꽃, 콩잎, 장승, 새, 소, 귀뚜라미, 비, 구름, 나귀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시적인 소재가 가득한 이 광경 속에서, 그는 한 발짝 물러나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 하지만, 풍경이 너무 많아 모두 담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 김욱(金熤)은 가을의 정취 속에서 나귀의 발걸음 소리마저 음악처럼 들리던 그 순간을 기억하며, 삶이 때론 느리고 소박하더라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적인 아름다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김욱(金熤)의 이 경험은 단순한 가을 풍경 감상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하는 순간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표현한 것이었다. 세상 일에서 잠시 벗어나 가을 풍경에 자신을 맡기며 느꼈던 그 깊은 감동. 아마도 그가 바라본 이 들판과 가을의 정취(情趣)는, 우리가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자연을 느끼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김욱(金熤)처럼 잠시 나귀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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