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長一麓是吾鄕, 獨擅豪華五十霜. 噴壑瀑流臧鼓吹, 繞林禽韻奏笙簧. 春山妓女花鈿擁, 秋葉綺軒錦幕張. 莫道書生骨相薄, 自矜淸福享無疆. |
영장산 한 자락이 내가 사는 마을인데, 오십 평생 내 맘대로 호화롭게 즐겼어라. 산골에 뿜는 폭포수는 웅장한 대취타요, 숲을 에워싼 새소리는 생황의 연주일세. 봄 산은 기생인 양 꽃 비녀를 꽂았고, 가을 잎은 멋진 누각에 비단 장막 펼쳤구나. 서생의 관상이 박복하다 말도 꺼내지 마라. 한량없는 청복을 누려 내가 봐도 자랑스럽다. 영장일록시오향, 독천호화오십상. 분학폭류장고취, 요림금운주생황. 춘산기녀화전옹, 추엽기헌금막장. 막도서생골상박, 자긍청복향무강. |
안정복(安鼎福·1712∼1791) |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의 자긍(自矜)은 그저 자랑이라기보다는 삶의 기쁨을 한껏 뽐내는 유쾌한 자기 선언이다. 이 시는 단순히 자기의 삶을 자랑하는 것 이상의 깊이를 지닌다. 첫 문장을 보면 "靈長一麓是吾鄕"이라 하여, '영장산(靈長山) 한 자락이 내가 사는 고향'이라고 밝히며, 자기 삶의 배경이 무엇인지 명확히 한다. 이는 마치 자기 고향의 풍경을 품고 사는 자랑처럼, 그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의 삶을 상징하는 영장산은 단순히 자연 경관을 넘어선다. '獨擅豪華五十霜'이라 하여, "오십 평생 내 맘대로 호화롭게 즐겼다"고 말하는 그는, 마치 자신이 자연의 부유한 백성이라도 된 듯이 스스로의 호사를 당당하게 자랑한다. 여기서 '오십 평생'이란 말은 그가 얼마나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50년을 산 그는 더 이상 세속적인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는 인생을 '호화로움'과 '자유로움'의 상징처럼 여긴다.
"噴壑瀑流臧鼓吹"에서 폭포수는 그가 듣는 대취타(大吹打)의 소리처럼 웅장하게 흐른다고 표현된다.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그 거대한 소리는 마치 군사적 의식에서 울려 퍼지는 대취타의 연주처럼, 그가 사는 세계를 정렬된 음악처럼 표현한다. 또한 "繞林禽韻奏笙簧"에서는 숲을 감도는 새들의 소리가 생황(笙簧)이라는 악기의 음색을 닮았다고 한다. 이는 자연의 소리가 그에게는 예술의 언어로 들린다는 점에서, 그가 일상적인 자연 속에서 예술적인 깊이를 느끼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봄과 가을을 비유하는 부분에서는 "春山妓女花鈿擁"과 "秋葉綺軒錦幕張"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봄 산은 마치 꽃 비녀를 꽂은 기생 같다고 하고, 가을 산은 비단 장막을 친 고급스러운 누각처럼 묘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연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문화적, 예술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변화가 사람의 삶처럼 다채롭고, 그 안에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닌다.
"莫道書生骨相薄"에서 그는 "서생의 관상이 박복하다"는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한다. 서생은 보통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들을 뜻하는데, 그 자신이 과거에 벼슬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주위에서 그를 비웃거나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이를 "자긍(自矜)"으로 극복한다. 즉, 자신이 아무리 벼슬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살아온 방식에서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긍(自矜)'이란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자만이나 오만을 넘어서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과 긍지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는 "청복(淸福)을 누린다"며, 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내적인 만족을 중요시한다. 그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나 명예가 아니라, 자연과의 일체감을 통해 얻은 고요한 행복이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自矜淸福享無疆"이다. 이 말은 '자신의 청복을 누리며, 그 복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시는 단순히 그가 과거의 실패나 세속적인 기준을 넘어서서 자연의 품에서 '자신만의' 복을 찾았다는 자랑을 담고 있다. 이 자랑은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자유와 만족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의 자랑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내면의 평화에 대한 찬미다.
그가 살았던 시기, 조선 후기의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외적인 요동이나 변화 속에서도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자연 속에서 평온한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자랑은 단순한 자아도취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철학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순암 안정복의 자긍(自矜)은 단순히 과시하는 시가 아니다. 그는 '자유롭고 고요한 삶', '자기 자신을 믿고 누리는 행복'을 통해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생을 살았음을 밝히며,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자긍(自矜)'을 통해 비록 물질적 부나 명예는 없을지라도, 자신이 가진 내면의 복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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