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地大染局, 幻化何太遽. 丹黃點飄蘀, 紅素吹花絮. 春秋迭代謝, 光景兩無處. 空色顚倒間, 冉冉流年去. |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 환상의 변화를 어쩜 저리 서두를까? 발갛고 노란 잎을 점점이 날리는 바람, 붉은 꽃과 흰 버들솜에 불어왔었네. 봄과 가을 번갈아 바뀌어도, 태양은 양쪽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공(空)과 색(色)이 뒤집히는 동안, 성큼성큼 세월은 흘러가누나. 천지대염국, 환화하태거. 단황점표탁, 홍소취화서. 춘추질대사, 광경양무처. 공색전도간, 염염유년거. |
신위(申緯·1769~1845) 낙엽(落葉) |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 낙엽들의 색채 잔치
가을이 오면 천지(天地)는 단숨에 대염국(大染局), 즉 거대한 염색 공장으로 변신한다. 평소엔 무심히 흘려보내던 풍경이 어쩜 이리도 화려하게 바뀔 수 있는지! 이름만 들어도 벌써 화사하지 않은가? 염색(染色)과 낙엽(落葉)의 시대가 열리며, 산과 들은 화장대 앞에서 한껏 꾸미기 바쁘다. 마치 요란한 무대 의상처럼 말이다.
염색 장인, 천지의 작업실
이 거대한 작업실의 장인은 다름 아닌 천지다.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의 작업 과정을 살짝 엿보자면, 먼저 환화(幻化), 즉 환상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환화(幻化)는 결코 느긋하지 않다. 시(詩)에서도 "환화하태거(幻化何太遽)"라 했듯, 너무도 빠르고 급작스럽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초록(草綠)으로 가득하던 산야(山野)가 단황(丹黃)과 홍소(紅素)로 물들어 버렸다.
천지가 한 번 붓을 들기 시작하면, 온 천지에 색채의 폭발이 일어난다. 단황(丹黃)은 노란빛, 홍소(紅素)는 붉은빛으로 그야말로 색의 향연이다. 바람(風)이 염색된 잎사귀를 들어 올리면, 그것들은 마치 무대에서 춤을 추듯 하늘을 떠돈다. 여기서 중요한 조연(助演)이 등장하니, 바로 점표탁(點飄蘀), 점점이 흩날리는 낙엽들이다.
바람의 동업자, 봄과 가을의 교대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에서 바람은 단순한 조수(助手)가 아니다. 사실 이 바람은 지난 봄에도 염색 공장을 도왔던 베테랑이다. 그때는 홍소(紅素)로 꽃잎을 불며 화서(花絮, 꽃 타래)를 흩뿌리더니, 이번에는 단황(丹黃)과 홍소를 혼합한 낙엽을 새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봄과 가을은 이처럼 한 팀이 되어 염색 공장을 교대한다.
시(詩)에서는 이를 "춘추질대사(春秋迭代謝)"라 표현했다. 봄과 가을이 번갈아 교대하며 서로의 몫을 마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는 그저 단순한 순환이 아니다.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색의 조합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태양, 무심한 관객
하지만 이런 대염국(大染局)의 화려함에도 정작 태양(太陽)은 관심이 없다. 시(詩)에서도 "광경양무처(光景兩無處)"라며, 태양은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태양은 그저 묵묵히 하루의 궤적을 따라갈 뿐이다.
“태양아, 넌 이 아름다움을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는 거야?”
그러자 태양은 대답한다.
“내 일은 비춰주는 것뿐. 멈춰서 감상하는 건 너희의 몫이지.”
이 무심함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변화가 가능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태양의 이런 태도가 없었다면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도 이토록 분주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공(空)과 색(色)의 엎치락뒤치락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의 가장 큰 매력은 공(空)과 색(色)의 끊임없는 교차다. "공색전도간(空色顚倒間)"이라는 구절처럼, 공(空)과 색(色)은 뒤집히고 섞이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처음엔 비어 있던 허공[空]이 색으로 채워지더니, 다시 허공(虛空)으로 돌아가는 이 주기적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무상(無常)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공(空)은 그저 색(色)의 뒷배경이 아니다. 공(空)은 언제나 색(色)을 품으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낙엽이 허공(虛空)에 날아가고 다시 땅으로 내려앉아 분해되면,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기초가 된다. 공(空)과 색(色),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이 아닌 공생이다.
세월(歲月), 대염국(大染局)을 지나가다
모든 쇼는 끝이 있다. 낙엽들의 무대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단황(丹黃)과 홍소(紅素)로 물들었던 나뭇잎들은 하나둘 땅에 내려앉고,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은 다시 조용해진다. 세월은 이를 지켜보며 말없이 지나간다. "염염유년거(冉冉流年去)"라 했듯, 세월은 늘 느긋하면서도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나 염색 공장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낙엽은 다시 흙이 되고, 흙은 새로운 생명을 키운다. 내년 봄, 천지대염국은 다시 문을 열 것이며, 이번엔 더욱 화려한 색을 준비할 것이다.
낙엽들이 남기는 메시지
"우리처럼 한 번쯤은 찬란히 물들어 보라."
낙엽들은 그렇게 속삭인다. 삶도 결국 공(空)과 색(色)의 반복이 아닐까. 매 순간을 온전히 색칠하고, 다시 비움으로 돌아가는 과정.
천지대염국(天地大染局)의 환상은 이렇게 끝났지만, 그 잔상은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세월(歲月)의 흐름 속에서도 매 순간의 색(色)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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