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009. 스승님의 시에 차운하다 [次靜觀齋韻 차정관재운]

오늘 漢詩 한 수/10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9. 22. 22:15

본문

1009. 스승님의 시에 차운하다 [次靜觀齋韻 차정관재운]



半畝方塘雨,
緇帷講誨詳.
雕蟲眞小技,
從此謝尋章.



반 이랑 네모난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치유에선 가르침이 상세하였지.
조충은 참으로 작은 재주이니,
이제부터 문구 찾기는 사양하리라.


반묘방당우, 치유강회상.
조충진소기, 종차사심장.

임영(林泳·1649~1696) 정관재의 시에 차운하다[次靜觀齋韻] 창계집(滄溪集)1

 

1666(현종7) 봄에 창계(滄溪)18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을 차지하자, 그의 스승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16281669)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早第誠非幸,
龍門訓已詳.
世間人事業,
亦不在文章.



일찍 급제한 건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니니,
용문의 가르침에 이미 소상하였네.
살면서 사람이 해야 할 공부는,
또한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조제성비행, 용문훈이상.
세간인사업, 역부재문장.

이단상(李端相·16281669)

 

위의 시()는 여기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방당(方塘)’이란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주자(朱子)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반 이랑의 네모난 연못 한 거울처럼 열렸는데,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이하여 그처럼 해맑은 것인가,
근원에 활수(活水)가 솟아나오기 때문이라네.


반무방당일감개, 천광운영공배회.
문거나득청여허, 위유원두활수래.

주자(朱子·1130~1200)

 

라고 읊은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 시()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문인 학자들은 집안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어두고 평소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실체를 살피는 공부에 전념한 사람이 많았는데, 창계(滄溪) 역시 이 방당(方塘)을 보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약석(藥石)으로 삼은 것이다.

 

창계(滄溪)는 학문(學問)과 자기 수양에 매진한 조선시대 학자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평생에 걸쳐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어린 시절 스승으로부터 받은 증시(贈詩)를 바탕으로 시()를 차운(次韻)했는데, 단순히 시의 형식을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승의 뜻을 깊이 헤아려 자신의 다짐과 각오를 시에 담아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치유(緇帷)’. 치유란 고인(高人)과 현사(賢士)가 강학(講學)하는 곳에 둘러친 검은 장막을 말하며, 스승의 강석(講席)을 뜻하기도 한다. 장자(莊子)』 「어부(漁父)공자(孔子)가 치유의 숲에서 노닐고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다[孔子遊於緇帷之林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는 구절이 그 어원이다. 창계는 이러한 학문적 전통 속에서 스승의 치유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각오를 굳혔다.

또한 조충(雕蟲)’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이는 조충전각(雕蟲篆刻)’에서 비롯된 말로, 마치 벌레 모양을 새기듯 작은 기술로 문장을 꾸미는 것을 말한다. 이 표현을 통해 창계는 단순히 글을 멋지게 꾸미는 것 이상의, 진정으로 학문에 깊이 있는 통찰력을 요구하는 내면의 성찰을 강조한다. 스승이 준 시()를 단순히 화려한 말로 치장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스승의 의도를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풀어낸다는 뜻이다.

창계는 이후로도 소학(小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해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등의 책을 섭렵하면서 학문에 매진했다. 공부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1671(현종 12) 겨울 23세 나이로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해, 1672년에는 가주서(假注書)라는 직함을 달고 승정원(承政院)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정치적 성장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이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신의 내면을 다듬으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문집(文集)을 보면 관직 생활에 진출한 이후에도 그는 초심(初心)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기 자신을 책려하며 끊임없이 성찰하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어린 시절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승이던 정관재(靜觀齋)가 그를 성취하도록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노력했던 것도 그의 학문적 열정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창계의 학문적 성장은 단순히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스승의 깊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이루어낸 학문적 성취의 결과이다. 그는 학문과 관직에서 모두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끝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