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 고향 꿈[記夢 示德求 기몽 시덕구]
夢罷寒床攬弊裘, 家山歷歷在醒眸. 黃花揷向堂前舞, 白酒携從社裡遊. 千里音容圓一夜, 兩鄕離別况三秋. 朝來急上危樓望, 薊樹遼雲去路脩. |
침상 추워 꿈 깬 뒤 해진 갖옷 두르고, 아직도 눈에 선한 고향 꿈을 생각한다. 국화 꽂고 부모 앞에 덩실덩실 춤추었고, 백주 들고 마을에서 친구들과 노닐었지. 그 음성 그 모습에 객지에서 기뻤는데, 두 고향을 이별하고 지금 가을임에랴. 아침 일찍 누대 올라 저 멀리 바라보니, 계주 숲 요동 구름 갈 길이 아득하다. 몽파한상람폐구, 가산력력재성모. 황화삽향당전무, 백주휴종사리유. 천리음용원일야, 량향리별황삼추. 조래급상위루망, 계수료운거로수. |
한응인(韓應寅·1554∼1614) 꿈을 기록하여 송덕구에게 보여 주다[記夢 示德求] 『백졸재유고(百拙齋遺稿)』 권1 |
백졸재(百拙齋) 한응인(韓應寅)은 조선 선조(宣祖) 시기 문인(文人)이자 정치가(政治家)로, 그에게는 ‘사신(使臣)’이라는 직함이 아주 익숙하다.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특이한 경력을 자랑한다. "사행(使行)을 한 번 다녀오기도 어려운 판에 다섯 번이라니, 대체 왜?"라고 궁금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출중한 외교적 재능 덕분이다.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고, 준수한 외모에다가 온화한 성품을 갖춰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거기다 뛰어난 글 솜씨와 꼼꼼한 일처리는 덤이었다. 그러니 사신으로 그를 계속 부를 수밖에!
특히, 그의 첫 사행은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였다. 31세의 나이에 그는 1584년 5월 3일 한양(漢陽)을 떠나 11월 1일에 귀국했다. 오늘날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거리를 그때는 왕복 6,200리나 되는 여정을 6개월에 걸쳐 다녀온 것이다. 의주(義州), 봉황성(鳳凰城), 요동(遼東), 심양(瀋陽), 산해관(山海關), 북경(北京)까지 길고도 고단한 여정은 말 그대로 대장정(大長征)이었다.
그가 지나온 여정은 마치 오늘날 오프로드 랠리처럼 모험적이었다. 새벽 안개, 한낮 먼지, 저녁 바람과 맞서 싸우며 풍찬노숙(風餐露宿), 즉 들에서 바람 맞으며 먹고 노숙(露宿)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모닥불 옆에서 몸을 녹이며 쉴 수 있었던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는 시(詩)에서 “추위에 잠을 깬 후 해진 갖옷을 둘렀다”고 할 정도로 여정이 녹록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 고단한 길 위에서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고향(故鄕)을 향했다. 외로움에 지친 새벽, 그는 꿈속에서 부모님을 뵙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따스한 장면을 그려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후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두 고향을 이별했다"는 말로 어머니의 손을 놓고 떠난 실제 이별(離別)과, 꿈속에서 잠시 다녀온 그리운 고향을 동시에 표현했다.
특히 이 시(詩)는 추석(秋夕)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을 명절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배가(倍加)되기 마련이다. 한응인(韓應寅)은 사신으로 중국에 머물며 명절을 보내야 했으니, 외로움과 향수(鄕愁)가 더 깊었을 것이다. 꿈에서 잠시 고향에 다녀왔지만, 현실로 돌아온 그는 누대(樓臺)에 올라 멀리 굽이굽이 이어진 먼 길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이 시(詩)는 한응인(韓應寅)의 외교적 임무 속에서 느낀 고단함과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담고 있다. 비록 그는 사신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지만, 그 길 위에서도 그의 마음은 늘 고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외국 땅에서 사신 역할을 훌륭히 해내면서도, 그에게 고향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이어진 길 속에서 그는 여전히 한양(漢陽)의 집과 가족, 친구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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