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極承恩日, 黃花泛酒時. 一堂親五六, 同樂太平期. 昔日分南北, 那知有此時. 淸秋佳節會, 千里若相期. |
대궐에서 성은을 받은 날이요, 국화 띄운 술을 마시는 때로다. 한 집안 대여섯이 한데 모여, 다 같이 태평성대를 즐기누나. 자극승은일, 황화범주시. 일당친오륙, 동악태평기. 부인의 차운시 옛날 남북으로 헤어져 있을 때, 어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소. 맑은 가을날 좋은 때 모였으니, 천릿길이 마치 기약한 듯하오. 석일분남북, 나지유차시. 청추가절회, 천리약상기. |
유희춘(柳希春·1513~1577), 송덕봉(宋德峯·1521~1578) 중구소작(重九小酌), 부차운 덕봉부인송씨호(附次韻 德峯夫人宋氏號) 『미암집(眉巖集) 권2』 |
고려말(高麗末), 조선초(朝鮮初) 학자들의 글을 보면 동료나 벗, 심지어 스승과 제자들 간에 시(詩)를 주고받는 건 흔한 일이다. 가끔 가족들, 특히 부형(父兄)이나 자제(子弟)와도 시(詩)를 주고받긴 하지만, 아내와 시(詩)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안방에서 부인(婦人)과 장난삼아 시(詩)를 주고받았다 해도, 그걸 문집에까지 당당히 실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우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선생님은 달랐다. 아니, 그의 부인 송씨(宋氏)가 달랐다고 해야 하나? 미암집(眉巖集)을 보면, 부인 송씨(宋氏)의 시(詩)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보낸 편지까지 당당히 실려 있다. 그런데 그 편지가 그저 사랑이 가득한 애정 어린 편지가 아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일침(一針)’을 가하는 꾸짖는 듯한 내용의 편지다. 이 정도로 당차고 거침없는 아내라면 당대의 여장부(女丈夫)라 불릴 만하다.
“……첩(妾)도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공(公)이 있으니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몇 달 동안 혼자 지낸 것을 가지고 매양 편지마다 구구절절(句句節節) 공을 자랑하는데, 60이 가까운 몸으로 그렇게 홀로 지내는 것은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첩(妾)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나 당신이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몇 달이라도 혼자 지내는 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이기는 합니다.
저는 옛날 어머님의 상(喪)을 당했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귀양 가 있어 그저 하늘을 울부짖으며 통곡(痛哭)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으로 장례(葬禮)를 치러서 남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사람들도 분묘(墳墓)나 제례(祭禮)가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다고들 하였습니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또 먼 길을 나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당신을 찾아간 일은 누가 모르겠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지성을 바쳤으니 이것이야말로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몇 달 홀로 지낸 일과 나의 몇 가지 일을 비교한다면 그 경중(輕重)이 어떻습니까?……”
(미암집 권7 일기 1570년 6월 12일)
유희춘(柳希春)이 함경도(咸鏡道) 종성(鍾城)으로 유배(流配)를 가게 된 것은 35세 때,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20여 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고, 55세가 되어 사면(赦免)을 받아 풀려났다. 그 동안 송씨부인(宋氏婦人)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삼년상(三年喪)을 치렀으며, 홀로 천 리 길을 떠나 남편을 찾아간다. 그 정도면 조선 시대 '슈퍼우먼' 아닌가?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함께한 부부(夫婦)였기에, 나중에 중양절(重陽節)에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세월을 회고하는 감회가 더 깊었을 것이다.
결국, 유희춘(柳希春)의 아내 송씨부인(宋氏婦人)은 그 시대를 앞서간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남편과 시(詩)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남편의 자랑을 꼬집고, 또 때로는 자신이 겪은 고난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며,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를 넘어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보여주었다. 부부간의 유머와 존중이 넘치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서, 당시의 엄격한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사랑과 해학(諧謔), 그리고 끈끈한 인간애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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