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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현서당지 제19호 오고대부(五羖大夫)

진현서당 주간지

by 진현서당 2024. 9.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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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장의 염소가죽으로 사 온 사람.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나라의 百里奚(백리해)를 이름. 진나라의 穆公(목공)이 다섯 장의 염소가죽으로 초나라에 代贖(대속)하고 백리해를 모셔와 그에게 國政(국정)을 맡겼다는 옛일.

 

: 다섯 오

: 검은 암양 고

: 큰 대

: 사내 부

 

백리해(百里奚)는 우()나라 출신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의 재상(宰相)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우()나라의 대부(大夫)였으나, 불행하게도 전쟁 중에 진나라(晉國)의 포로가 됩니다. 이후 진()나라 목공(穆公)에게 시집 온 진헌공(晉獻公)의 딸을 뒷바라지하게 되었는데, 이 비참한 현실에 견디지 못하고 초()나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초()나라에서 바로 관리(官吏)에게 잡히게 되죠. ()나라에서 백리해(百里奚)의 존재를 알게 된 진()나라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가 뛰어난 인재임을 알아보았고, 그를 양가죽 다섯 장(五張之皮)에 교환해 데려오도록 합니다. 여기서 양가죽 다섯 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저렴한 값이었는데, 이는 백리해(百里奚)가 늙은 나이(老年)로 평가받아 가치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백리해(百里奚)는 그때 70(七十歲)였으나, 나이가 많아 쓸모없을까 망설이는(躊躇) 목공(穆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저를 부른 이유가 날아다니는 새(飛鳥)를 쫓고 맹수를 잡게 하려는 것이라면, 저 역시 이미 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일을 맡기려 하신다면 저는 아직 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공 여상(太公 呂尙)이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난 것이 80(八十歲)였으니, 저는 그보다 10년이나 젊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를 재상으로 발탁(任命)합니다. 백리해(百里奚)는 뛰어난 정치적 지혜로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목공(穆公)을 도와 진()나라가 강력한 제국(帝國)으로 도약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백리해(百里奚)의 고사(故事)는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有能人材)는 반드시 등용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특히 백리해(百里奚)가 말한 "나라의 일을 맡기려면 아직 젊다"는 그의 말은, 실제 능력과 성과가 나이를 초월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고사는 오늘날에도 인재 등용(人才登用)의 원칙으로 널리 인용되고 있으며, 특히 노련함(經驗)과 지혜를 중시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백리해(百里奚)의 이야기는 진()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이바지한 위대한 인재기용 사례(登用事例)로 남아, 후대에 백리해(百里奚)의 지혜(智慧)와 겸손(謙遜)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조량(趙良)이 상앙(商鞅)에게 백리해(百里奚)의 어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옛날 목공 때의 백리해는 가난했지만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목공께서 그의 현명함을 들으시고 만나보고자 하셨으나 백리해는 여비가 없어 나그네에게 몸을 팔아 소를 치면서 따라갔습니다. 목공이 이를 알고 백리해를 소치는 신분에서 백관의 위에 서게 하셨으나 진나라에서는 감히 불만을 품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리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6,7년이 지나서 동으로는 정나라를 쳤고, ()나라의 군주를 세 번씩이나 교체시켰으며, 초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백리해가 어진 정치를 베푸니 오랑캐까지 복종해 따랐습니다. 백리해는 재상을 지내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수레 덮개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백리해가 행차할 때는 수행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갑병(甲兵)도 없었습니다. 백리해의 공로는 문서 창고에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으며, 덕행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조차 노래를 하지 않았으며,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흥얼거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백리해의 정치요,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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