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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선비의 부채[題扇 제선]

오늘 漢詩 한 수/12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12. 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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幾回擊絶千年事?
也復橫遮十丈塵.
知子生平藏玉貌,
路中人少意中人.


기회격절천년사? 야부횡차십장진.
지자생평장옥모, 노중인소의중인.



천년의 역사를 보면서
몇 번이나 내려쳐서 부쉈던가?
열 길로 솟구친 먼지도
가로막으려 자주 펼쳤었지.
한평생 백옥 같은
그대 모습 잘 아나니,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대 마음에 드는 이 없네.

최창대(崔昌大·16691720) 부채[題扇 제선]

 

題扇 (제선)은 조선 숙종(肅宗) 시대의 명신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가 부채를 주제로 지은 시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부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비의 마음과 그가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분노를 예술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부채 하나에 담긴 복잡한 감정선을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게 풀어내면서도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이 시는 단순한 물건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세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드러냅니다.

 

부채, 그것은 단순한 여름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선비들에게 부채는 그들의 인격과 사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였으며, 때로는 외로움과 분노를 잠재우는 신비한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채는 그저 더위를 식히는 도구일 뿐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적인 면들을 가리고, 마음의 고독을 채우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부채가 낡고 닳아 더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최창대(崔昌大)는 부채를 매개로 주인의 마음을 짚어냅니다.

 

시의 첫 번째 구절, "幾回擊絶千年事?" (기회격절천년사?)에서는 부채를 내리쳐서 수차례 '천년의 일'을 깨뜨렸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천년의 일"이란 말은 비유적 의미로, 오래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고통과 억울함을 나타냅니다. 마치 최창대는 그 부채로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불만을 세 번, 네 번, 아니 몇 번이고 내리쳤다는 것처럼, 부채는 그에게 있어 마음의 치유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분노를 발산하는 도구였음을 암시합니다. "기회격절(擊絶)"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오래된 감정들을 단호하게 내리쳐버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분출(噴出)’의 행위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떨쳐내려는 결단과도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구절, "也復橫遮十丈塵" (야부횡차십장진)은 부채가 "열 길이나 되는 먼지"를 가로막으려 한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 부채는 단순히 먼지를 치우는 도구로 묘사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일들이나 사회적 부조리를 가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선비들은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직시하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채를 펼쳐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최창대(崔昌大)는 이 구절을 통해 세상에 대한 외면혹은 그 부정적인 현실을 가리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먼지가 "가로막힌다"고 표현된 것은, 그가 세상에서 경험한 불편한 진실들정치적 불만, 개인적 억울함,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을 바라보기 싫다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 것입니다.

 

"知子生平藏玉貌" (지자생평장옥모)에서는 "그대의 평생이 백옥 같은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백옥은 매우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최창대는 그가 알던 사람, 즉 부채의 주인인 홍세태(洪世泰)백옥 같은순수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점은 부채의 주인이 겉으로는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면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부채는 그가 쌓아온 감정과 함께 그 사람의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고독을 비추는 상징적 아이템입니다. 그가 가진 백옥 같은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그 내면에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서려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 "路中人少意中人" (노중인소의중인)은 길을 가는 사람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의중인은 그가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최창대는 이 구절을 통해 세상의 인간관계에 대한 불만과 고독감을 드러냅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니, 그는 세상에서 자기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교감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부채는 그런 고독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이 부채를 통해 최창대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진정한 동반자나 소통의 대상을 찾을 수 없음을 깊은 슬픔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부채의 물리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창대(崔昌大)는 부채를 통해 주인의 내면을 풀어내고, 그 내면에 담긴 고독과 분노,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채는 단순히 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도구일 뿐 아니라, 마음속에 억눌린 감정들이 표출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채가 다 닳고 떨어져 나가자, 최창대(崔昌大)는 그 부채에 남아 있는 감정의 흔적을 그대로 시로 옮겨 담았습니다.

 

부채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 주인의 마음을 고백하는 도구가 되었던 그 시대의 선비들에게, 부채는 일종의 심리적 방패였습니다. 세상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도구, 고독과 울분을 삭히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부채는, 이 시를 통해 최창대(崔昌大)의 마음을 고백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습니다. 부채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 주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단순히 물건을 보물처럼 다루는 것을 넘어,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불만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최창대(崔昌大)의 시에서 부채는 단순히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겪는 고뇌와 고독을 잘 표현하는 인간의 마음을 대표하는 물건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성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부채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받으며, 또 때로는 그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 시는, 그 시대의 선비들이 느꼈을 고독과 분노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여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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