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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회 조상 사당에서 통곡하며 한 왕이 순국하고, 서천에 들어온 두 장수가 공을 다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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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百一十八回

哭祖廟一王死孝 入西川二士爭功三國志演義

 

118

조상 사당에서 통곡하며 한 왕이 순국하고, 서천에 들어온 두 장수가 공을 다투다.

 

卻說後主在成都聞鄧艾取了綿竹諸葛瞻父子已亡大驚急召文武商議近臣奏曰城外百姓扶老攜幼哭聲大震各逃生命後主驚惶無措忽哨馬報到說魏兵將近城下多官議曰兵微將寡難以迎敵不如早棄成都奔南中七郡其地險峻可以自守就借蠻兵再來克複未遲光祿大夫譙周曰不可南蠻久反之人平昔無惠今若投之必遭大禍

 

한편, 후주는 성도에서 등애가 면죽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급히 문무 관료를 불러모아 상의했다. 측근 신하가 아뢰기를, "성 밖에서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안은 채 크게 소리내어 울며 각자 목숨을 구해 달아나고 있습니다." 했다. 후주가 놀라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갑자기 정찰 기병이 달려와서 말하기를, 위나라 군사가 성벽 아래에 이르렀다고 했다. 많은 신하가 의논하기를, "병사도 적고 장수도 모자라니 맞서 싸우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일찌감치 성도를 포기하고 남중 7군으로 달아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곳의 지세가 험준하니 스스로 지킬 수 있을뿐더러 곧 오랑캐 병사를 빌려서 되돌아와 수복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광록대부(고문 응대 담당) 초주가 말하기를, "불가하옵니다. 남만 오랑캐는 오랫동안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고 평소에 아무 은혜도 베푼 적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그곳으로 간다면 반드시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했다.

 

多官又奏曰吳既同盟今事急矣可以投之周又諫曰自古以來無寄他國爲天子者臣料魏能吞吳吳不能吞魏若稱臣於吳是一辱也若吳被魏所吞陛下再稱臣於魏是兩番之辱矣不如不投吳而降魏魏必裂土以封陛下則上能自守宗廟下可以保安黎民願陛下思之後主未決退入宮中

 

많은 관료가 아뢰기를, "촉나라와 오나라가 이미 동맹을 맺었고, 지금 사세가 위급하니 오나라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초주가 다시 간하기를, "예로부터 남의 나라에 몸을 맡긴 천자는 없었습니다. 신이 헤아려보건대 위나라는 오나라를 병탄할 수 있으나 오나라는 위나라를 병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오나라에 신하를 칭한다면 이것은 치욕입니다. 만약 오나라가 위나라에 병탄되면 폐하는 다시 위나라에 신하를 칭해야 하니, 두 번이나 치욕을 겪게 됩니다. 차라리 오나라로 가지 마시고 위나라에 투항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위나라가 틀림없이 땅을 쪼개주며 폐하를 봉할 것이니 위로는 능히 스스로 종묘를 지킬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생각해 주십시오.”

 

하니, 후주가 결정하지 못하고 물러나 궁중으로 들어갔다.

 

次日衆議紛然譙周見事急複上疏諍之後主從譙周之言正欲出降忽屏風後轉出一人厲聲而罵周曰偷生腐儒豈可妄議社稷大事自古安有降天子哉後主視之乃第五子北地王劉諶也後主生七子長子劉璿次子劉瑤三子劉琮四子劉瓚五子即北地王劉諶六子劉恂七子劉璩七子中惟諶自幼聰明英敏過人餘皆懦善後主謂諶曰今大臣皆議當降汝獨仗血氣之勇欲令滿城流血耶

 

다음날,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이 분분한데, 초주가 사태가 위급함을 보고, 다시 상소하여 간쟁했다. 후주가 초주의 말을 따라 나가서 투항하려는데, 갑자기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돌아나오며, 소리높여 초주를 꾸짖기를,

 

구차히 목숨을 구하는 썩은 유생아! 어찌 망녕되게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대사를 논하느냐! 예로부터 어느 천자가 투항한 적이 있더냐!”

 

했다. 후주가 바라보니, 그는 바로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다. 후주에게 아들이 일곱 있는데, 맏아들은 유선이고, 둘째 아들은 유요이며, 셋째 아들은 유종이고, 넷째 아들은 유찬이며, 다섯째 아들은 바로 북지왕 유심이고, 여섯째 아들은 유순이며, 일곱째 아들은 유거였다. 일곱 아들 가운데 오직 유심만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함이 남달랐고, 나머지 모두는 여리고 착하기만 했다. 후주가 유심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제 대신들 모두가 항복이 마땅하다고 하거늘, 네 홀로 혈기의 용맹만 믿고 성안 가득히 피를 흘리게 할 셈이냐?”

 

했다.

 

諶曰昔先帝在日譙周未嘗幹預國政今妄議大事輒起亂言甚非理也臣切料成都之兵尚有數萬薑維全師皆在劍閣若知魏兵犯闕必來救應內外攻擊可獲大功豈可聽腐儒之言輕廢先帝之基業乎後主叱之曰汝小兒豈識天時諶叩頭哭曰若勢窮力極禍敗將及便當父子君臣背城一戰同死社稷以見先帝可也奈何降乎後主不聽諶放聲大哭曰先帝非容易創立基業今一旦棄之吾寧死不辱也後主令近臣推出宮門遂令譙周作降書遣私署侍中張紹駙馬都尉鄧良同譙周齎玉璽來雒城請降

 

유심이 말하기를,

 

지난날 선제께서 살아 계실 적에 초주는 일찍이 국정에 간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가 망녕되게 대사를 의논하며 함부로 어지러운 말을 지껄이니 이치에 매우 어긋납니다. 신이 급히 헤아려봐도 성도에는 아직 수만 명의 군사가 있습니다. 또한 강유가 군사를 온전히 거느리고 모두 검각에 있습니다. 만약 위나라 군사가 궁궐을 침범한 것을 그가 알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안팎으로 공격하면 큰 공을 거둘 수 있사옵니다. 어찌 썩은 유생의 말만 들으시고 함부로 선제의 왕업을 폐하십니까?”

 

하니, 후주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까짓 어린애가 어찌 하늘의 시운을 알겠느냐!”

 

했다. 유심이 머리를 바닥에 찧고 울면서 말하기를,

 

세력이 궁하고 힘이 다해 재앙과 실패가 곧 닥치더라도 저희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일전을 치러서 사직과 함께 죽어야 선제를 뵐 수가 있사옵니다. 어찌 항복을 하겠습니까!”

 

하니, 후주가 듣지 않았다. 유심이 목 놓아 크게 울며 말하기를,

 

선제께서 쉽게 왕업을 창립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하루아침에 포기하는 것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치욕을 겪을 수는 없습니다.”

 

했다. 후주가 근신에게 명하여 유심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고, 마침내 초주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했다. 사서시중(사사로이 시중이 된) 장소와 부마도위 등량을 보내어 초주와 함께 옥쇄를 가지고 낙성으로 가서 항복을 청하게 했다.

 

時鄧艾每日令數百鐵騎來成都哨探當日見立了降旗艾大喜不一時張紹等至艾令人迎入三人拜伏於階下呈上降款玉璽艾拆降書視之大喜受下玉璽重待張紹譙周鄧良等艾作回書付三人齎回成都以安人心三人拜辭鄧艾徑還成都入見後主呈上回書細言鄧艾相待之善後主拆封視之大喜即遣太仆蔣顯齎敕令薑維早降遣尚書郎李虎送文簿與艾共戶二十八萬男女九十四萬帶甲將士十萬二千官吏四萬倉糧四十餘萬金銀各二千斤錦綺彩絹各二十萬匹餘物在庫不及具數擇十二月初一日君臣出降

 

이때 등애는 매일 철갑 기병 수백 기를 시켜 성도로 가서 정탐하게 했다. 그날 항복하는 깃발을 세운 것을 보고 등애가 크게 기뻐했다. 얼마 안 되어 장소와 사람들이 찾아오니 등애가 사람들을 시켜 맞아들였다. 세 사람이 섬돌 아래에서 절한 뒤, 항복 문서와 옥쇄를 바쳤다. 등애가 뜯어서 항복 문서를 읽고 크게 기뻐하며 옥쇄를 받아들이고, 장소 초주 등량을 후대했다. 등애가 회신을 써서 세 사람에게 주고 성도로 돌아가 인심을 안정시키게 했다. 세 사람이 등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바로 성도로 돌아와서 후주를 만나러 들어가 회신을 바치며, 등애가 잘 대우해준 것을 자세히 말했다. 후주가 회신을 뜯어서 읽더니 크게 기뻐하며 즉시 태복(거마 담당) 장현에게 칙서를 지니고 강유를 찾아가 조속히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상서랑(정무 처리) 이호를 보내어 각종 문서와 장부를 등애에게 주었다. (촉한은) 모두 호수가 28만 호에, 남녀가 94만이고, 갑옷을 갖춘 장병이 102천 명이며, 관리가 4만 명이고, 창고의 식량이 40여 만에, 금은이 각각 3천 근이며, 여러 가지 비단이 각각 20만 필이었다. 창고에 있는 다른 물품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12월 초하루를 택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나가서 항복하기로 했다.

 

北地王劉諶聞知怒氣沖天乃帶劍入宮其妻崔夫人問曰大王今日顏色異常何也諶曰魏兵將近父皇已納降款明日君臣出降社稷從此殄滅吾欲先死以見先帝於地下不屈膝於他人也崔夫人曰賢哉賢哉得其死矣妾請先死王死未遲諶曰汝何死耶崔夫人曰王死父妾死夫其義同也夫亡妻死何必問焉言訖觸柱而死諶乃自殺其三子並割妻頭提至昭烈廟中伏地哭曰臣羞見基業棄於他人故先殺妻子以絕掛念後將一命報祖祖如有靈知孫之心大哭一場眼中流血自刎而死

 

북지왕 유심이 이를 듣고, 성난 기운이 하늘을 찔러 칼을 차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 아내 최씨 부인이 묻기를,

 

오늘 대왕의 안색이 평소와 다른데 무슨 일입니까?”

 

하니, 유심이 말하기를,

 

위나라 군사가 다가오자 부황께서 벌써 항복 문서를 바치고, 내일 군신이 항복하러 나간다니 이로써 종묘사직이 없어지게 됐소. 내가 먼저 죽어 지하에서 선제 폐하를 뵐지언정 타인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소!”

 

했다. 최씨 부인이 말하기를,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죽어야 할 때를 만났습니다! 소첩이 먼저 죽고 왕께서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유심이 말하기를,

 

당신이 왜 죽겠다는 것이오?”

 

하니, 최씨 부인이 말하기를,

 

왕께서 부친을 위해 죽는 것이나, 소첩이 남편을 위해 죽는 것이나 그 의로움은 같습니다. 남편이 죽어 그 아내가 죽는데 하필 그 까닭을 물어야 합니까?”

 

했다, 말을 마치더니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이에 유심이 아들 셋을 죽이고, 아울러 아내의 머리를 잘라서, 소열제(유현덕)의 사당 안으로 가져가서, 땅에 엎드려 곡하며 말하기를,

 

신은 물려받은 왕업을 남에게 넘겨주는 것을 부끄럽게 보므로, 먼저 처자식을 죽여서 근심을 없앤 뒤에 제 목숨을 바쳐 할아버지의 은덕을 갚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영령이 있다면, 손자의 마음을 알아주소서!”

 

하고, 한바탕 크게 곡하여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蜀人聞知無不哀痛

 

촉나라 사람들이 듣고,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後人有詩贊曰

 

君臣甘屈膝一子獨悲傷

去矣西川事雄哉北地王

捐身酬烈祖搔首泣穹蒼

凜凜人如在誰雲漢已亡

 

뒷사람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임금과 신하들이 달게 무릎을 꿇는데, 한 아들이 홀로 비통하구나.

서천의 왕업도 이제 끝이 났지만, 훌륭하구나! 북지왕이여!

몸을 바쳐 소열제 할아버지의 은덕을 갚고, 머리를 긁으며 하늘을 우러러 눈물 흘리네.

늠름한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 듯하니, 누가 한나라가 이미 망했다고 말하랴!”

 

했다.

 

後主聽知北地王自刎乃令人葬之次日魏兵大至後主率太子諸王及群臣六十餘人面縛輿櫬出北門十裏而降鄧艾扶起後主親解其縛焚其輿櫬並車入城

 

후주는 북지왕이 자결한 것을 듣고, 사람들을 시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다음날, 위나라 군사가 크게 몰려오자, 후주가 태자와 여러 왕 그리고 6십여 명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양손을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북문 밖 십 리에 나가서 항복했다. 등애가 후주를 부축해 일으켜서 친히 결박을 풀어주고, 수레에 실린 관을 불사른 뒤에 수레를 나란히 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後人有詩歎曰

 

魏兵數萬入川來,

後主偷生失自裁

黃皓終存欺國意,

薑維空負濟時才

全忠義士心何烈,

守節王孫志可哀

昭烈經營良不易,

一朝功業頓成灰

 

뒷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위나라 군사 몇만 명이 서천을 침입하자,

후주가 구차히 살고자 자결할 때를 놓쳤네.

황호는 끝내 국가를 기만할 뜻을 가졌고,

강유는 헛되이 세상을 구원할 재주라고 자부했네.

충의를 다한 선비의 마음이 얼마나 열렬한지,

절개를 지킨 왕손의 뜻이 슬프구나.

소열제의 경영이 참으로 쉽지 않았거늘,

하루아침에 공든 왕업이 갑자기 잿더미가 되었네.

 

했다.

 

於是成都之人皆具香花迎接艾拜後主爲驃騎將軍其餘文武各隨高下拜官請後主還宮出榜安民交割倉庫又令太常張峻益州別駕張紹招安各郡軍民又令人說薑維歸降一面遣人赴洛陽報捷艾聞黃皓奸險欲斬之皓用金寶賂其左右因此得免自是漢亡

 

이에 성도의 사람들이 모두 향과 꽃을 가지고 영접했다. 등애가 후주를 표기장군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 문무 관료도 지위 고하에 따라서 관직을 내린 뒤에, 후주에게 궁궐로 돌아가서 방을 내어 백성을 안심시키게 하고, 창고를 넘겨받았다. 또한 태상(종묘의례 담당) 장준과 익주 별가(보좌관) 장소를 시켜, 각군의 군사와 백성을 불러서 위로하게 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강유에게 투항을 설득했다. 한편으로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승첩을 알렸다. 등애가 황호의 간사하고 음험함을 듣고 참하려 하지만, 황호가 금은보화(金銀寶貨)로 등애의 측근을 매수해서 목숨을 구했다. 이로부터 한나라가 망했다.

 

後人因漢之亡有追思武侯詩曰

 

猿鳥猶疑畏簡書,

風雲常爲護儲胥

徒令上將揮神筆,

終見降王走傳車

管樂有才原不忝,

關張無命欲何如

他年錦裏經祠廟,

梁父吟成恨有餘

 

뒷사람(李商隱)이 한나라가 망한 것을 두고, 무후(제갈공명)를 추념해서 시를 짓기를,

 

원숭이와 까마귀도 명령이 두려워 머뭇거리고,

바람과 구름도 항상 울타리가 되어 보호하려 했네.

헛되이 상장군에게 신필을 휘두르게 하지만,

마침내 항복한 임금이 수레를 타고 가는구나.

원래 관중과 악의에 못지않은 재주를 가졌으나,

관우와 장비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니 어찌하랴?

다른 해 금관성(성도)에서 사당을 지날 때,

양보음은 한이 되고도 남으리라.

 

했다.

 

且說太仆蔣顯到劍閣入見薑維傳後主敕命言歸降之事維大驚失語帳下衆將聽知一齊怨恨咬牙怒目須發倒豎拔刀砍石大呼曰吾等死戰何故先降耶號哭之聲聞數十裏維見人心思漢乃以善言撫之曰衆將勿憂吾有一計可複漢室衆皆求問薑維與諸將附耳低言說了計策即於劍閣關遍豎降旗先令人報入鍾會寨中說薑維引張翼廖化董厥等來降會大喜令人迎接維入帳會曰伯約來何遲也維正色流涕曰國家全軍在吾今日至此猶爲速也

 

한편, 태복(거마 담당) 장현이 검각에 이르러, 들어가 강유를 만나서 후주의 칙명을 전하며, 황제가 투항한 것을 말했다. 강유가 크게 놀라서 말을 잃었다. 군막 안의 여러 장수가 이를 듣고 일제히 원망하며, 이를 갈면서 분노로 눈을 부릅뜨고 머리칼이 곤두서서 칼을 뽑아 돌을 자르며 크게 외치기를,

 

우리들이 죽기로 싸울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먼저 항복한단 말인가!”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수십 리 밖에까지 들렸다. 강유가 사람들이 진심으로 한나라를 생각하는 것을 보고, 좋은 말로써 위무하기를,

 

장수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내게 계책이 하나 있으니 한나라의 황실을 되찾을 수 있소.”

 

했다. 장수들이 모두 물으니, 강유가 여러 장수에게 귓속말로 말소리를 낮춰 계책을 설명했다. 즉시 검각관에 항복의 깃발을 두루 세우고, 먼저 사람을 종회의 영채로 보내, 강유가 장익, 요화, 동궐을 이끌고 항복하러 갈 것이라고 알렸다. 종회가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강유를 영접하여 군막으로 들였다. 종회가 말하기를,

 

백약(강유)께서 오기가 어찌 그리 늦으셨소?”

 

하니.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국가의 모든 군사가 제게 있는데, 오늘 여기 왔으니, 오히려 빠른 것이오.”

 

했다.

 

會甚奇之下座相拜待爲上賓維說會曰聞將軍自淮南以來算無遺策司馬氏之盛皆將軍之力維故甘心俯首如鄧士載當與決一死戰安肯降之乎會遂折箭爲誓與維結爲兄弟情愛甚密仍令照舊領兵維暗喜遂令蔣顯回成都去了卻說鄧艾封師纂爲益州刺史牽弘王頎等各領州郡又於綿竹築台以彰戰功大會蜀中諸官飲宴艾酒至半酣乃指衆官曰汝等幸遇我故有今日耳若遇他將必皆殄滅矣多官起身拜謝忽蔣顯至說薑維自降鍾鎮西了艾因此痛恨鍾會遂修書令人齎赴洛陽致晉公司馬昭

 

종회가 이를 아주 훌륭하다고 여기고, 자리에서 내려와 서로 절하고, 상빈으로 대우했다. 강유가 종회에게 말하기를,

 

듣자니, 장군께서 회남에서 오신 이래, 계획에 실책이 없었다고 하였소. 사마씨가 번성하는 것도 모두 장군의 힘이니, 제가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오. 만약 등사재(등애)였다면, 마땅히 더불어 죽기를 각오한 싸움을 벌이지, 어찌 기꺼이 그에게 항복하겠소?”

 

했다. 종회가 이에 화살을 꺾어 맹서하며 강유와 형제의 의를 맺고, 그 정의가 아주 친밀해서 이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강유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마침내 장현을 성도로 돌아가게 했다. 한편, 등애가 사찬을 익주자사로 봉하고, 견홍과 왕기 등에게 각각 주군(고을)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면죽에 대를 쌓아 전공을 자랑하고, 촉나라의 여러 관리를 크게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등애가 술이 거나해지자, 뭇 관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다행히 나를 만나서, 오늘이 있는 것이지, 만약 다른 장수를 만났으면, 틀림없이 모두 전멸되었을 것이오.”

 

했다. 많은 관리가 일어나 절을 올리며 감사했다. 갑자기 장현이 오더니, 강유가 스스로 진서장군 종회에게 투항한 것을 말했다. 등애가 이로 말미암아 종회를 몹시 미워했다. 마침내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낙양으로 가서 진공 사마소에게 전하게 했다.

 

昭得書視之書曰臣艾切謂兵有先聲而後實者今因平蜀之勢以乘吳此席卷之時也然大舉之後將士疲勞不可便用宜留隴右兵二萬蜀兵二萬煮鹽興冶並造舟船預備順流之計然後發使告以利害吳可不征而定也今宜厚待劉禪以致孫休若便送禪來京吳人必疑則於向化之心不勸且權留之於蜀須來年冬月抵京今即可封禪爲扶風王錫以資財供其左右爵其子爲公侯以顯歸命之寵則吳人畏威懷德望風而從矣

 

사마소가 글을 읽어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 등애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용병에 있어서, 명성을 먼저 한(적군의 사기를 꺾은) 다음에 실력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이제 촉나라를 평정한 기세로써 오나라를 친다면, 이야말로 석권할 때입니다. 그러나 군사를 크게 일으킨 뒤라서, 장수와 군사들이 피로하므로 곧바로 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농우(농서)의 병력 2만과 촉의 병력 2만을 남겨서 소금을 굽고 대장간을 일으켜서, 아울러 배를 만들어 장강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계책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관리를 보내어 이해득실(利害得失)로써 알리면, 오나라는 정벌하지 않아도 평정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유선을 후대하여 손휴에게 알려야 합니다. 만약 유선을 서울로 보낸다면, 오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여 귀화할 마음을 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유선을 잠시 촉나라에 머물게 하고, 내년 겨울철에 서울로 보내야 합니다. 이제 즉시 유선을 부풍왕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재물을 하사하며, 그를 돌볼 사람들을 제공하고, 그 아들들에게 공후의 작위를 주어서 귀순한 사람에게 주는 은혜를 드러내십시오. 그리하면 오나라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우러러서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복종할 것입니다.”

 

했다.

 

司馬昭覽畢深疑鄧艾有自專之心乃先發手書與衛瓘隨後降封艾詔曰征西將軍鄧艾耀威奮武深入敵境使僭號之主系頸歸降兵不逾時戰不終日雲徹席卷蕩定巴雖白起破強楚韓信克勁趙不足比勳也其以艾爲太尉增邑二萬戶封二子爲亭侯各食邑千戶鄧艾受詔畢監軍衛瓘取出司馬昭手書與艾書中說鄧艾所言之事須候奏報不可輒行艾曰將在外君命有所不受吾既奉詔專征如何阻當遂又作書今來使齎赴洛陽時朝中皆言鄧艾必有反意司馬昭愈加疑忌忽使命回呈上鄧艾之書

 

사마소가 읽고 나서 등애가 제멋대로 처리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는가 깊이 의심하고, 먼저 편지를 써서 위관에게 주었다. 뒤따라 등애를 책봉하는 천자의 조서를 내리게 하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정서장군 등애는 위용을 빛내고 무력을 떨쳐 적의 영토에 깊숙히 들어가서, 참람하게 황제라 칭한 군주(유선)로 하여금 목을 얽어 투항하게 하였소. 용병에 있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아, 싸움이 하루를 넘기지 않았고, 구름 속을 헤치고 휩쓸어서, 파촉을 평정했소. 비록 백기가 저 강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한신이 저 강한 조나라를 이겼다고 한들, 등애의 공훈에 비하기에 부족하오. 등애를 태위로 임명하고, 식읍을 2만 호로 늘리며, 두 아들을 정후로 봉하고, 식읍을 각각 1천 호로 하겠소.”

 

했다. 등애가 조서를 받은 후에, 감군 위관이 사마소의 편지를 꺼내서 등애에게 주었다. 편지에서 등애가 말한 일들은 반드시 임금에게 아뢰어 보고한 후를 기다려야지, 바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등애가 말하기를,

 

장수가 바깥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소. 내가 이미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마음대로 정벌하거늘, 어찌 막을 수 있다는 말이오.”

 

하고, 이에 다시 서신을 써서, 이제 온 사자에게 주어서 낙양으로 보냈다. 이때 위나라 조정에서 모두 등애가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말하니, 사마소가 더욱 의심했다. 갑자기 사자가 돌아와서, 등애의 서신을 바쳤다.

 

昭拆封視之書曰艾銜命西征元惡既服當權宜行事以安初附若待國命則往複道途延引日月。《春秋之義大夫出疆有可以安社稷利國家專之可也今吳未賓勢與蜀連不可拘常以失事機兵法進不求名退不避罪艾雖無古人之節終不自嫌以損於國也先此申狀見可施行司馬昭看畢大驚忙與賈充計議曰鄧艾恃功而驕任意行事反形露矣如之奈何賈充曰主公何不封鍾會以制之昭從其議遣使齎詔封會爲司徒就令衛瓘監督兩路軍馬以手書付瓘使與會伺察鄧艾以防其變

 

사마소가 봉투를 뜯어서 읽어보니 서신에 이르기를,

 

제가 명령을 받들어 서쪽을 정벌하여, 이미 원흉이 굴복했으니, 마땅히 임시로 일을 처리해서 초기에 복속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만약 국가의 명령을 기다린다면, 길을 왕복하느라 시일을 지체할 것입니다. <춘추>의 대의에 따르면, 대부가 국경을 나가서 사직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이롭게 한다면,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오나라가 아직 굴복하지 않았고, 그 세력이 촉나라와 연결돼 있으니, 관례에 얽매여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병법에 진군할 때는 명성을 구하지 않고, 후퇴할 때는 죄를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옛사람들의 절개는 없으나, 끝내 스스로 부끄러운 일로써 나라에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보고서보다 먼저 일을 시행하겠습니다.”

 

했다. 사마소가 읽고 나서 크게 놀라, 황망히 가충과 더불어 토의하여 말하기를,

 

등애가 공훈을 믿고 교만해서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며, 반역의 기미를 드러냈소. 어찌해야겠소?”

 

하니, 가충이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어째서 종회를 봉해서 등애를 제어하지 않으십니까?”

 

했다. 사마소가 그 의견을 따라, 사자에게 조서를 주어 종회를 사도로 임명했다. 나아가 위관에게 (등애와 종회의) 두 방면의 군마들을 감독하라고 명령하고, 그에게 편지를 주어서 종회와 협력하여 등애를 살펴서 변고를 방비하라고 했다.

 

會接讀詔書詔曰鎮西將軍鍾會所向無敵前無強梁節制衆城網羅迸逸蜀之豪帥面縛歸命謀無遺策舉無廢功其以會爲司徒進封縣侯增邑萬戶封子二人亭侯邑各千戶鍾會既受封即請薑維計議曰鄧艾功在吾之上又封太尉之職今司馬公疑艾有反志故令衛瓘爲監軍詔吾制之伯約有何高見維曰愚聞鄧艾出身微賤幼爲農家養犢今僥幸自陰平斜徑攀木懸崖成此大功非出良謀實賴國家洪福耳若非將軍與維相拒於劍閣艾安能成此功耶今欲封蜀主爲扶風王乃大結蜀人之心其反情不言可見矣晉公疑之是也

 

종회가 조서를 받아 읽으니 조서에 이르기를,

 

진서장군 종회는 가는 곳마다 적이 없고, 그 앞에서는 강한 것이 없으며 여러 성을 장악하여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었소. 촉나라의 용맹한 장수들도 두 손을 묶어 귀순했소. 계책을 내어 실책이 없었고, 거사에서 버릴 공로가 없었소. 이에 종회를 사도로 임명하고, 현후(제후)로 봉하여, 식읍을 1만 호로 늘리고, 두 아들을 정후로 봉하여 식읍을 각각 1천 호로 하겠소.”

 

했다. 종회가 책봉을 받은 뒤, 즉시 강유를 불러 계책을 의논하며 말하기를,

 

등애의 공로가 나보다 위에 있고, 또한 태위의 직위를 받았소. 이제 사마소 공께서 등애에게 반역의 뜻이 있다고 의심하여, 위관을 감군으로 삼고, 내게 조서를 내려 그를 제어하게 하는데, 백약(강유)의 고견을 듣고 싶소.”

 

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등애는 출신이 미천하고, 어려서는 농가에서 송아지를 키웠소. 이제 요행히 음평의 비탈길을 통해서, 나무를 붙잡고 벼랑에 매달려 이러한 큰 공을 이뤘으나, 이것은 어떤 뛰어난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국가의 홍복에 힘입었을 뿐이오. 만약 장군께서 나와 검각에서 대치하지 않았다면, 등애가 어찌 이러한 공을 이룰 수 있었겠소? 이제 촉나라 임금을 부풍왕으로 봉하려 하다니, 이것은 촉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결속시키는 것이니, 그 반역의 뜻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소. 진공(사마소)이 의심하는 것이 옳소.”

 

했다.

 

會深喜其言維又曰請退左右維有一事密告會令左右盡退維袖中取一圖與會昔日武侯出草廬時以此圖獻先帝且曰益州之地沃野千裏民殷國富可爲霸業先帝因此遂創成都今鄧艾至此安得不狂會大喜指問山川形勢維一一言之會又問曰當以何策除艾維曰乘晉公疑忌之際當急上表言艾反狀晉公必令將軍討之一舉而可擒矣會依言即遣人齎表進赴洛陽言鄧艾專權恣肆結好蜀人早晚必反矣於是朝中文武皆驚會又令人於中途截了鄧艾表文按艾筆法改寫傲慢之辭以實己之語

 

종회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강유가 또 말하기를,

 

청컨대 좌우를 내보내 주시오. 내게 한가지 은밀히 고할 일이 있소.”

 

하니, 종회가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강유가 소매 속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어 종회에게 주며 말하기를,

 

지난날 무후(제갈량)께서 초려에서 나올 적에 이 지도를 선제께 바치며 말씀하시기를, ‘익주의 지리는 기름진 들판이 천 리에 펼쳐지고, 백성과 국가가 부유하니, 가히 패업을 이룰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셨소. 선제께서 이 때문에 성도에서 창업하신 것이오. 이제 등애가 이곳에 왔으니, 어찌 광분하지 않겠소?”

 

했다. 종회가 크게 기뻐하며, 산천의 형세를 가리키며 묻자, 강유가 일일이 말해 주었다. 종회가 다시 묻기를,

 

마땅히 무슨 계책으로 등애를 없애야겠소?”

 

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진공이 그를 의심하는 틈을 타서 급히 표를 올려, 등애에게 모반의 정황이 있다고 하시오. 진공이 틀림없이 장군을 시켜 그를 토벌하라 할 것이니, 일거에 잡을 수 있을 것이오.”

 

했다. 종회가 그 말에 따라, 즉시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표를 바쳐서, 등애가 권력을 제멋대로 방자하게 휘두르고, 촉나라 사람들과 결탁하니 조만간 틀림없이 반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조정의 문무 관료가 모두 경악했다. 종회가 또한 사람을 시켜 중도에서 등애의 표문을 가로챈 뒤, 등애의 필법을 베껴서 자신을 높이는 말로 오만한 글을 고쳐 썼다.

 

司馬昭見了鄧艾表章大怒即遣人到鍾會軍前令會收艾又遣賈充引三萬兵入斜穀昭乃同魏主曹奐禦駕親征西曹掾邵悌諫曰鍾會之兵多艾六倍當令會收艾足矣何必明公自行耶昭笑曰汝忘了舊日之言耶汝曾道會後必反吾今此行非爲艾實爲會耳悌笑曰某恐明公忘之故以相問今既有此意切宜秘之不可泄漏昭然其言遂提大兵起程時賈充亦疑鍾會有變密告司馬昭昭曰如遣汝亦疑汝耶吾到長安自有明白早有細作報知鍾會說昭已至長安會慌請薑維商議收艾之策正是才看西蜀收降將又見長安動大兵

 

사마소가 등애의 표를 읽더니, 크게 노하여 즉시 사람을 종회의 군영으로 보내어, 종회로 하여금 등애를 잡게 하고, 또한 가충을 보내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사곡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마소가 위나라 군주 조환과 함께 황제의 수레를 몰아 친정에 나섰다. 서조연(태위, 승상 소속의 관리) 소제가 간하기를,

 

종회의 병력이, 등애보다 여섯 배나 많으니, 마땅히 종회가 등애를 잡기에 족하거늘, 어째서 꼭 명공께서 친히 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사마소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난날의 말을 잊었단 말이오? 그대가 일찍이 종회가 훗날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소. 내가 지금 이렇게 가는 것은 등애 때문이 아니라, 실은 종회 때문이오.”

 

했다. 소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명공께서 그것을 잊으셨을까 걱정해서 일부러 물은 것입니다. 이제 이런 뜻이 있으시니, 절대 비밀로 하시고 누설되지 않게 하십시오.”

 

했다. 사마소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이에 대군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이때 가충도 또한 종회가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은밀히 사마소에게 고하니, 사마소가 말하기를,

 

만약 그대를 보냈으면 그대도 역시 의심해야겠소?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오.”

 

했다. 어느새 세작(첩자)이 종회에게 사마소가 이미 장안에 이르렀다고 알리니, 종회가 황망히 강유를 불러, 등애를 잡을 계책을 상의했다. 이야말로, 서촉에서 항복한 장수를 보자마자, 다시 장안에서 대군이 움직이는 것을 보네.

 

不知薑維以何策破艾且看下文分解

 

강유가 무슨 계책으로 등애를 깨트릴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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