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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호미 씻다가[洗鋤小池 세서소지]

오늘 漢詩 한 수/9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9. 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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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호미 씻다가[洗鋤小池 세서소지]



石梁俯小池,
楓陰水常靜.
鯈魚戱從容,
故觸丹書影.



돌다리에서 작은 못 굽어보노라니,
단풍 그늘 속에 물은 늘 고요해라.
피라미란 놈 조용함을 희롱하는지,
짐짓 붉은 글씨 그림자를 건드리네.


석량부소지, 풍음수상정.
조어희종용, 고촉단서영.

김창업(金昌業·1658~1722) 작은 못에 호미를 씻으려다[洗鋤小池] 노가재집(老稼齋集)2

 

조선 후기의 명문가 출신인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에 관한 일화(逸話). 벼슬에 대한 욕심을 일찌감치 버리고, 그는 한양(漢陽) 동쪽 송계(松溪)라는 자연 속에 은거하며 손수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냈다.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의 영광 대신 고요한 자연과 벗하는 삶을 택한 것이 인상적이다.

김창업(金昌業)은 그가 살던 곳에 노가재(老稼齋)’라는 거처와 함께 여러 건물을 지었는데, 이곳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농사의 의미와 은거의 정취를 담은 작은 세계였다. 그는 농사일에 종사하며 여가에는 자연을 관조하고, 그 속에서 삶을 성찰했다. 말하자면, 농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의 대화를 위한 매개체였던 셈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시()는 김창업(金昌業)이 농사일을 마치고 작은 못에서 호미를 씻던 중, 돌다리 관조량(觀鯈梁)’에서 자연의 한 장면을 포착하며 지은 것이다. 돌다리 아래 고요한 수면에 단풍이 비치고, 그 속에서 피라미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피라미들이 돌다리 위에 새겨진 붉은 글자의 그림자를 건드리며 헤엄치는 장면이다. 마치 글자 속에 있는 상상 속의 피라미와 현실 속 피라미가 만나서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광경은 우연이 아닌, 시인(詩人)의 깊은 성찰과 자연에 대한 관조(觀照)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시인(詩人)은 장자(莊子)가 호량(濠梁)에서 물고기와 교감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연비어약(鳶飛魚躍)’ ,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물에서 뛰어오르는 생명의 약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저 작은 못은 하나의 소우주(小宇宙)이며, 나아가 시인(詩人)의 마음 속 풍경이기도 하다.

김창업(金昌業)은 세속의 욕심을 버림으로써 일상 속에서도 쉽게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의 시적 관찰은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면의 성찰과 정신적 고요를 얻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연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찾은 한 은자(隱者)의 삶을 담고 있다. 농사를 짓고 돌다리 위에서 피라미와 교감하는 그의 모습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소우주(小宇宙) 같은 못에서 헤엄치는 피라미가 우리 마음 속에도 존재하며,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餘裕)와 지혜(智慧)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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