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⑩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 [韜光養晦 도광양회]

본문

감출 도, 빛 광, 기를 양, 그믐 회

 

칼을 칼집에 넣어 검광(劍光)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도광(韜光)이라고도 한다. 약자가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을 때 많이 인용된다.

 

월왕 구천(越王 句踐)의 와신상담(臥薪嘗膽)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재상 범려(范蠡)와 함께 굴욕적인 포로 생활을 했다. 그는 오나라 왕 부차(夫差)의 마굿간에서 말똥을 치우고, 부차(夫差)의 병을 직접 핥아주는 등 온갖 수모를 겪었다. 범려(范蠡)의 조언을 받아들인 구천(句踐)은 겉으로는 철저히 복종하며 부차(夫差)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땔나무에 누워 자고(臥薪 와신), 쓸개를 맛보며(嘗膽 상담) 치욕을 잊지 않았고,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국력을 회복하고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재상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20년 후, ()나라가 초()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 틈을 타 기습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복수에 성공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때를 기다리고 힘을 기르는 전략으로 승리하였다.

 

겸손하고 소탈한 유비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三國志演義 삼국지연의에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 남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여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던 계책이다. 유비는 채마밭을 꾸며 소일하며 다른 뜻이 전혀 없다는 듯 위장하였다. 조조의 책사들은 유비의 실력이 나날이 커가는 데 대해 우려하여 유비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라는 조언을 계속 올렸다. 조조(曹操)가 유비를 초대해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오늘날 천하에는 영웅이 나와 그대 두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조조의 질문을 받고 유비가 대답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서 천둥이 쳤고, 유비가 천둥 소리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이 광경을 본 조조가 대장부가 어찌 천둥을 두려워한단 말이오라고 말하자 유비는 짐짓 벌벌 떨면서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친다는 것은 세상에 변고가 있다는 말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후 조조는 유비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것을 그만두었으며, 이때 유비가 쓴 계략을 도광양회(韜光養晦)’ 또는 도회지계(韜晦之計)’라고 불러왔다.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얻은 유비(劉備)의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펼치면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승리하며 형주(荊州), 익주(益州)를 차지하여 촉()을 취한 다음 힘을 기르도록 하여 위(()와 균형을 꾀하게 하였다. 약자가 강자의 경계를 피하며 내부 역량을 강화하고, 기회를 포착하여 비상하였다.

 

머리 깎고 천하를 주유한 이침(李沈)

()나라 17대 임금인 선종(宣宗) 이침(李沈·810~859)에 관한 고사가 있다. 이침(李沈)은 당 헌종(唐憲宗)13번째 아들이었다. 당시는 환관(宦官)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헌종(憲宗)이 환관들에 의해 독살당한 후 820년 목종(穆宗)이 왕위에 올랐다. 목종이 수은이 든 장생불로약(長生不老藥)을 먹고 4년 후 죽자 그 아들 경종(敬宗)이 왕위를 이었고, 그가 18세로 요절하자 경종의 동생이었던 문종(文宗), 무종(武宗)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20년 사이에 4명의 왕이 바뀌었다.

 

이침(李沈)은 왕위를 이어가는 조카들에게는 시기와 불안의 대상이었다. 왕이 된 조카들은 이침(李沈)보다 한 두 살이 많았다. 그는 조카인 무종(武宗)이 즉위했을 때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돼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했다. 그것이 나중에 왕이 되는데 큰 깨달음이 됐다. 백성들의 삶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님으로 있을 때 강서성(江西省) 황벽산(黃檗山)의 절에 있던 희운(希運)이라는 승려와 함께 지은 시()가 있다. ‘관폭포연구(觀瀑布聯句)’라는 시다. 희운(希運)이 앞 두 줄을 짓고, 이침(李沈)이 뒷 두 줄을 지었다.

 

희운(希運)이 황벽산(黃檗山)의 높은 폭포를 보면서

 

千巖萬壑不辭勞, 수많은 바위와 봉우리들을 지났네,

遠看方知出處高. 멀리서 보니 높은 것을 알겠네.

천암만학불사로원간방지출처고.

 

라고 운을 떼자, 이침(李沈)

 

溪澗豈能留得住, 계곡물을 어찌 붙들어둘 수 있을까?

終歸大海作波濤. 큰 바다로 흘러가 파도가 되는 것을.

계간기능류득주, 종귀대해작파도.

 

이라고 댓구를 붙였다. 이침(李沈)이 왕위에 뜻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암시했다는 시().

 

이침(李沈)은 그 후 조카를 몰아내고 37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환관(宦官)의 세력을 누르고 제2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뤄냈다. 당선종(唐宣宗) 이침(李沈)에게서 나온 고사가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기미(羈縻)를 위하여

도광양회(韜光養晦)1980년대부터 중국이 취한 대외정책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중국은 '기미(羈縻)' 정책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기미(羈縻)란 굴레를 씌워 얽맨다는 뜻으로, 주변국을 중국의 세력 범위 안에 묶어두고 통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중국은 그동안 초강대국인 미국의 그늘에 가려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1980년대 개혁·개방정책을 취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기미정책(羈縻政策)을 달성하기 위한 대외정책의 뼈대로 삼았다. 이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국력이 생길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면서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전술적으로도 협력하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은 중국의 외교방향을 제시한 ‘28자 방침을 발표하였다. 먼저 냉정한 관찰(冷靜觀察 냉정관찰)’, 중국이 어떤 입장을 내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에 국제정세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변화되어 가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스스로 내부의 질서와 역량을 공고히 하고(穩住陣腳 온주진각), 중국의 국력과 이익을 고려해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며(沈著應付 침저응부),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르면서(韜光養晦 도광양회), 능력이 없는 듯 낮은 기조를 유지하는 데 능숙해야 하고(善於藏拙 선어장졸), 절대로 앞에 나서서 우두머리가 되려하지 말되(決不當頭 결부당두), 꼭 해야만 하는 일은 한다(有所作爲 유소작위)는 것이다. '28자 방침'은 이처럼 중국의 국익이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지 않는 한,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할 일을 하되, 전반적으로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 전체적인 뜻을 비교적 잘 대변하는 도광양회(韜光養晦)’유소작위(有所作爲)’로 축약하여 언급되기도 한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