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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산보[倚杖 의장]

오늘 漢詩 한 수/1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5. 1. 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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倚杖柴門外,
悠然發興長.
四山疑列戟,
一水聽鳴璫.
鶴立松丫暝,
雲生石竇凉.
遙憐十年夢!
款款此中忙!



지팡이 짚고서 사립문 나서니,
상쾌한 기분이 끝없이 샘솟네.
사방의 산들은 창을 세워 호위하고,
한 줄기 시내는 구슬처럼 흘러가네.
솔숲 길에 학이 서서 날은 저물고,
바위틈에 구름 피어 서늘해지네.
까마득히 떠오르네. 십 년 세월 꿈이여!
그 속에서 내 얼마나 허둥댔던가!


의장시문외, 유연발흥장.
사산의열극, 일수청명당.
학립송아명, 운생석두량.
요련십년몽! 관관차중망!

이숭인(李崇仁·1349~1392) 지팡이 짚고서[倚杖 의장]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을 나서니까, 뭐랄까, 날씨도 딱 좋고 바람도 시원하니,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줄 그런 시간이 왔다고나 할까. 이럴 때면 문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그 공기의 신선함이 내 마음을 울린다. 그리곤 한 걸음, 두 걸음. 산이 나를 감싸는 듯, 사방의 산들이 마치 창처럼 세워져서 호위하는 것 같다. 보이지도 않던 그런 경계선이 느껴진다. 뭔가 두툼하고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런 장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산들이 서서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옆에 시내가 졸졸 흐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구슬처럼 맑고 깨끗하다. 이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욱 진정된다. 마치 시냇물에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그런 느낌.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것들이 나를 위로해주는지 모르겠다. 이런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평화를 주는지, 내가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시냇물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저 내 발걸음에 따라 걸어가는 길이 즐겁기만 하다. 그런데, , 그저 걷고 있으면 또 이내 생각이 난다. 학이 솔숲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학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그냥 그렇게 멈춰 있는 느낌이다. 어둠 속에서 점점 그 학의 형체가 흐릿해지면서 날은 저물고, 바위 틈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장면은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솔숲 속에서 흩어지는 구름은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느낌이 이상하게도 나를 살아있다는 느낌을 다시금 주는 것 같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인 걸까. 어쩌면, 이 작은 존재가 자연과 함께할 때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을 맞이하는 걸지도.

 

그런데 말이지,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나는 또 무엇을 생각할까? 딱히 특별한 일은 없지만, 그저 떠오르는 건 십 년 전의 꿈이다. 정말 십 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처럼 지나가고, 그 사이 나도 꽤 많이 변했을 텐데, 나는 그때 꿈꾸었던 것들을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보지 못한 게 아닐까? 그래도 그때는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고, 실패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 꿈들이 마치 오래된 그림처럼 흐릿해져서, 그저 지나온 시간들이 가벼운 꿈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그렇게 오랫동안 허둥대며 지나왔던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순간에만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만 느껴지는 그런 여유롭고 편안한 기분은 분명히 나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다시 일깨운다. 그 꿈들이 그렇게도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나는 여전히 그 꿈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 꿈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리 허둥거리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나 역시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뤘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걷는 것뿐이다. 산과 시냇물, 학과 구름,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구름까지 모두 나의 일상 속 풍경들이다. 이 풍경 속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건, 나에게 주어진 일이자, 나의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놓고, 그저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평온한 하루를 맞이하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음을 깨달으며, 나는 계속 나아간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허둥댔던 것들은 이제 지나간 일이지만,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저 나만의 시간, 나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은 아무리 아득하고 험해도 내가 걸어갈 길이니까.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은 어쩌면 내가 잊고 있던, 그 오래된 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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