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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성탄절 -원수를 사랑하라-

오늘 漢詩 한 수/12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12. 2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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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道耶蘇法,
忘讐又愛仇.
回看天不共,
此理炳千秋.



예수의 교법을 듣자니,
원한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네.
하늘 함께 이지 않는단 말씀 돌아보라,
이 이치가 바로 천추에 빛나는 것이지.


문도야소법, 망수우애구.
회간천불공, 차리병천추.

김평묵(金平黙·1819~1891), 『중암집(重菴集)』 권3 「서교(西敎)에 원한을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인정에 가깝지 않은 말이다. [西敎有忘讐愛仇之語 直是不近人情]」

 
김평묵(金平默)의 시(詩)에서 등장하는 "원한(怨恨)을 잊고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교법(敎法)을 듣고 난 후의 반응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가 말하는 ‘서교(西敎)’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독교(基督敎), 또는 예수의 가르침을 말한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난 김평묵(金平默)의 반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어이없어 보인다. 원한을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본다.
 
“원수를 사랑하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마 이런 반응이었을 것 같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원수(怨讐)’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원수(怨讐)는 단순히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넘어서, 어떤 끔찍한 고통을 주었던 사람,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라는 걸까? 아마 김평묵(金平默)도 그 당시 그 가르침이 조금 황당하게 들렸을 것이다. “천리를 거스르고 인심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아버지의 원수(怨讐)는 하늘 아래 두지 않는다”는 구절을 알고 있다. 이 말은 동아시아에서 널리 퍼진 관념으로, 원수(怨讐)를 갚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관념과 전혀 상반된 것이다. 원수(怨讐)에 대한 보복(報復)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사랑을 베풀라니! 김평묵(金平默)의 반응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외쳤을 법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김평묵(金平默)이 이 교법(敎法)에 대해 단순히 반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교법(敎法)의 이치를 깨달은 후 그 자체를 고백한 점이다. 김평묵(金平默)은 단순히 '망수애구(忘讐愛仇)'의 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실행되기 어려운, 그리고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찬찬히 곱씹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김평묵(金平默)처럼 그냥 “어이없네, 그게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이 언젠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는 매일, 자신만의 원수(怨讐)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준 고통이 그저 흔적만 남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怨讐)를 용서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 모든 고통을 덮어놓고 그냥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 고통을 끌어안고, 그 고통 속에서 길을 찾으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김평묵(金平默)이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교법(敎法)을 듣고 비판적으로 반응했을 때, 그는 단순히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돌아보며 그 이치가 천추(千秋)에 걸쳐 빛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 이치, 즉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교훈은 단순히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교훈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법(敎法)을 단순히 ‘그렇구나’ 하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원수(怨讐)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나 자신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사랑하라’고 말하며, 그 이상의 이치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길일지도 모른다.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한 번쯤은 웃어봤다면, 그 웃음 속에 숨겨진 진심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고민하는 그 순간, 바로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예수의 가르침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어려운 것처럼 들리더라도, 그 속에 숨겨진 큰 의미를 조금씩 실천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불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수(怨讐)’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스스로를 더 크게 성장시키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교법(敎法)은 단순히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
 
성탄절(聖誕節)이다. 예수의 탄생(誕生)을 기념하며, 그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자.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그 교훈이 과연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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