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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달빛, 국화, 그리고 풍류[月下賞菊 월하상국]

오늘 漢詩 한 수/11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11. 1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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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來無處不風流,
佳節須從物色求.
黃菊有花皆九日,
碧天懸月卽中秋.
淸光照席詩魂冷,
嫩蘂當樽酒味柔.
相對此花兼此月,
謫仙彭澤擬同遊.



흥이 나면 그 어딘들 풍류 아닌 곳 없나니,
명절이란 모름지기 물색에서 찾아야지.
노란 국화 활짝 피면 그날이 중구일이고,
푸른 하늘에 달 걸리면 그날이 중추절이로다.
밝은 달빛 자리에 비추니 시혼이 맑아지고,
어여쁜 꽃술 술잔에 띄우니 술맛이 부드럽네.
이 꽃을 마주하며 이 달까지 함께 어울리니,
적선이랑 팽택이랑 함께 노니는 격일세.


흥래무처불풍류, 가절수종물색구.
황국유화개구일, 벽천현월즉중추.
청광조석시혼랭, 눈예당준주미유.
상대차화겸차월, 적선팽택의동유.

권벽(權擘·1520~1593) 달빛 아래에서 국화를 보며[月下賞菊 월하상국] 습재집(習齋集)2

 

달빛 아래 국화 감상: 풍류로 일상이 명절되는 마법의 레시피

 

가을밤, 달빛 아래에서 노란 국화를 감상하며 술 한 잔 기울이는 장면. 듣기만 해도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조선 중기의 문인 권벽(權擘)이 쓴 이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 시의 핵심은 일상(日常)을 명절(名節), 평범(平凡)을 특별(特別)로 만드는 비결을 재치 있게 풀어내는 데 있다. , 그러면 시를 한 줄씩 곱씹으며 우리의 일상에 풍류(風流)를 더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1. 흥이 나면 어디든 풍류 아닌 곳 없다

 

興來無處不風流 (흥래무처불풍류)

권벽 선생의 첫 문장은 팍팍한 일상을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충격요법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만 있으면 모든 곳이 풍류(風流)!" 이게 무슨 뜻인가? 누군가는 "흥이 있어야 무슨 풍류든 즐기지!"라며 맞장구칠 테지만, 이 말은 흥을 찾아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다가도 흥이 생길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 대신 창밖을 보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銀杏木)가 보일지도 모른다. 엉겁결에 흥을 찾아낸다면, 당신의 무미건조한 하루도 풍류로 바뀐다.

 

2. 명절이란 물색에서 찾아라

 

佳節須從物色求 (가절수종물색구)

명절(名節)은 단지 달력에 표시된 빨간 날만이 아니다. 권벽은 "물색(物色), 즉 자연과 환경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라"고 한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점심 식사를 하다가 불현듯 김치찌개(泡菜湯)가 맛있으면 그날은 당신만의 찌개 명절이다.

명절은 거창한 준비 없이도 찾아온다. 필요한 건 조금의 관찰력(觀察力)과 열린 마음(開放的心). 자연스럽게, “오늘 뭐라도 흥미로운 일 없나?”라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3. 노란 국화와 푸른 하늘

 

黃菊有花皆九日, 碧天懸月卽中秋 (황국유화개구일, 벽천현월즉중추)

노란 국화(黃菊)가 피면 그날이 바로 중구일(重九日), 하늘에 둥근 달()이 걸리면 중추절(仲秋節)이다. 달력에 박제된 날만 명절이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보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어라? 중구일이 국화 핀 날? 중추절이 달이 뜬 날이라고? 그럼 내가 매일매일 국화 키우고 달 보면 맨날 명절 아닌가?"

정답이다. 권벽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날, 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명절이라는 발상의 전환(發想的轉換). 당신이 국화를 키우든, 카페에서 라떼아트를 감상하든 상관없다. 당신만의 명절을 만들어라.

 

4. 달빛과 국화의 더블 어택

 

淸光照席詩魂冷, 嫩蘂當樽酒味柔 (청광조석시혼랭, 눈예당준주미유)

달빛(淸光)은 정신(詩魂)을 맑게 하고, 국화의 꽃술(嫩蘂)은 술맛(酒味)을 부드럽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연을 누리는 순간의 감각(感覺)이다.

권벽은 달빛이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고(맑아진다고 술을 더 마신 건 아니겠지?), 꽃술이 술잔에 띄워져 술맛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 얼마나 세밀한 감각인가! 요즘 세상에서 이렇게 섬세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보통 "술은 쓰고, 잔은 작다"는 불평만 하지 않는가?

 

5. 도잠과 이백, 풍류의 멘토들

 

相對此花兼此月, 謫仙彭澤擬同遊 (상대차화겸차월, 적선팽택의동유)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등장하는 팽택(彭澤)과 적선(謫仙)은 각각 도잠(陶潛)과 이백(李白)을 뜻한다. 도잠은 국화(菊花), 이백은 달()을 사랑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하다. 권벽은 달빛 아래에서 국화를 보며 술잔을 들다가 , 이건 도잠이랑 이백이랑 셋이서 마셔야 제맛인데?”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도 평소 좋아하는 멘토가 있지 않은가? 상상으로라도 그들과 술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는 상상만으로도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6. 명절은 당신이 만드는 것

 

결국 이 시는 단순한 달밤 감상문이 아니다. 일상의 순간에 흥()을 불어넣어 특별한 날로 바꾸는 기술(技術)을 가르쳐준다. 현대인은 특히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회식자리에서 고깃집 냄새가 코를 찌를 때, “이 냄새, 오늘의 향수(香水)로다!”라고 여겨보라.

비 오는 날, “이 비는 분명 하늘의 감미로운 위스키(水威士忌)”라며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노트북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때, “이건 하늘이 내게 명상의 시간을 주는 것이로다!” 하고 생각하라.

그렇다. 풍류란 대단한 준비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달빛 한 자락, 국화 한 송이, 술 한 잔이면 충분하다. 명절은 달력에서 찾지 말고 당신의 마음에서 찾아라. 그렇게 일상이 명절이 되면, 그 순간 당신은 권벽의 진정한 후예(後裔).

 

마무리하며

 

권벽(權擘) 선생의 시()는 말한다. "자연(自然)과 흥()이 있는 곳에 진정한 명절이 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노란 국화 대신 노란 맥주를 들고 달빛 아래 걸어보자. 그 자체로도 충분히 월하상국(月下賞菊)’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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