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宵苦不寐, 撫枕仍撫琴. 寂寂千村黑, 寥寥萬壑沈. 星臨蓬戶動, 雲宿玉溪深. 簷角金鷄叫, 淸愁鬢上侵. |
추운 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베개를 더듬다 거문고를 타본다. 적막해라 일천 마을은 캄캄하고, 쓸쓸해라 일만 골짜기는 침침하다. 별들이 쏟아져 집집마다 반짝이고, 구름이 잠들어 골골마다 잠겨 있다. 처마 모서리에 새벽닭 울고, 귀밑에는 수심의 백발이 돋아났다. 한소고불매, 무침잉무금. 적적천촌흑, 요요만학침. 성림봉호동, 운숙옥계심. 첨각금계규, 청수빈상침. |
이응희(李應禧·1579∼1651) [獨夜 독야] |
쌀쌀한 밤에 잠 못 드는 애환이야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익숙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응희(李應禧), 호(號)가 옥담(玉潭)이라는 시골 양반이 이 깊고 깊은 밤에 잠 못 이뤄 시름을 탄 한 편의 시다. 어느 날 밤, 차가운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지만, 세상 일들은 다 잊어도 이 추운 공기가 코끝에서 들락날락하며 정신을 가차 없이 깨운다. 몸은 찬데, 이 몸뚱이를 따뜻하게 덮을 방도는 마땅치 않으니, 시름의 연주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자, 이 겨울밤의 거문고 타령, 시작해 보자.
한밤중이 다 돼도 한숨은커녕, 잠은 깜깜(黑黑) 무소식이다. 한소고불매(寒宵苦不寐), 그렇다, “추운 밤 잠 못 드는 괴로움이라!” 이를 어찌하겠는가? 아, 이런 밤에 베개라도 도닥이며 달래야겠구나 하고 팔베개를 해보다가, 어림도 없다는 듯 베개만 툭툭 친다. 그러다 아무래도 베개로는 부족할 듯하여 시름의 동반자, 거문고를 잡아든다. 그래서 무침잉무금(撫枕仍撫琴)이라, 베개를 만지다, 거문고를 만진다니! 이거야말로 ‘촉각의 이중연주’ 아닌가?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은 그야말로 적적천촌흑(寂寂千村黑)이고, 요요만학침(寥寥萬壑沈)이다. 다시 말해, ‘적적한 천 개 마을이 캄캄하고, 고요한 만 개 골짜기가 어두컴컴’하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단잠에 빠져들었건만, 이 인간은 어쩌자고 이러고 있나? 이 외로움의 밤에, 혼자 깨어 아무도 없는 이 적막한 풍경을 들여다보며, 차라리 새와 벌레라도 불러와야겠구나 싶다.
그런데 곧 하늘에서 빛이 반짝거리니, 어라? 알고 보니 별들이 내려와 초가집 처마와 낮은 지붕들 위에 자그마한 반딧불처럼 내려앉아 흔들흔들 반짝이는 것이다. 성림봉호동(星臨蓬戶動)! ‘별이 초가집 위로 내려와 흔들린다’라니, 오호라! 생각해 보니, 이 밤의 별들조차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청객 아니던가. 남의 집 처마에 내려앉아 반짝거리며 숙면 방해 작전을 펼치니 말이다.
그러나 구름은 아무런 관심 없다. 아예 골골(谷谷) 깊숙이 들어가서 편히 잠을 잔다. 운숙옥계심(雲宿玉溪深), ‘구름이 옥계에 깊숙이 잠들어 있다’더니, 옥계(玉溪)라니,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부드럽고 편안한 안식처인가. 구름만큼은 참 한가하다 못해 꿈나라에서 이불까지 두텁게 덮고 있는 것 같구나.
이리저리 깨어난 밤을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동틀 무렵, 문득 처마 끝에서 새벽 닭이 고개를 쳐들더니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첨각금계규(簷角金鷄叫), ‘처마 끝에 금빛 닭이 운다’더니, 이 닭도 참, 무슨 황금 닭이 된 것처럼 기세가 대단하구나. 그러나 이 닭마저도 ‘어이, 잠 좀 자게 조용히 좀 해’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니, 차가운 공기와 자책의 시름이 교차한다. 청수빈상침(淸愁鬢上侵), 바로 ‘맑은 근심이 귀밑머리까지 침투했다’는 말 그대로이다. 외로운 밤, 저절로 생긴 근심과 망상들이 내 머리칼 속에서 흰 빛을 피워 올리며, 이미 세월을 초월한 하얀 흔적이 돋아나는 듯하다. ‘아, 또 새벽이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니, 오늘 밤의 거문고도 이로써 멈춘다.
이 외로운 밤, 애써 내 손에 쥔 거문고와 수염 위에 생긴 백발 몇 가닥이 지금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듯하다. “이보게, 잠 못 이룬 밤은 세월의 풍경이라네. 내일 아침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가 오니, 그저 유유히 살아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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