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日出杲杲, 木落神靈雨. 開窓萬慮淸, 病骨欲生羽. |
동쪽에서 눈부시게 해가 떠오르고, 신령한 비인가 나뭇잎이 떨어진다. 창문 열자 온갖 걱정 말끔해지고, 병든 몸에선 날개가 돋으려 한다. 동일출고고, 목락신령우. 개창만려청, 병골욕생우. |
남효온(南孝溫·1454~1492)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題聖居山元通庵窓壁 제성거산원통암창벽] |
남효온(南孝溫)은 세조(世祖)가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강탈해버리자, 그 부당함에 분노하여 관직을 버리고 절개(節槪)를 지킨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그는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고, 성거산(聖居山)의 원통암(元通庵)에 잠시 머물게 된다. 그야말로 하룻밤의 머묾(一宿)! 그럼에도 이 밤이 남효온(南孝溫)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고 만다.
동일출고고, 목락신령우! (東日出杲杲, 木落神靈雨!)
동쪽 하늘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남효온(南孝溫)은 잠시 이 모든 고민을 잊어버릴 만큼 감동한다. 새벽 공기 중에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落葉)이었다. 그런데 그 낙엽이 보통 낙엽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효온(南孝溫)의 눈에는 그것이 신령(神靈)의 비(雨)로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찬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낙엽으로 볼 터인데, 우리 남효온(南孝溫) 선생의 비범한 시선에는 그것이 신령한 존재들이 흩뿌려 주는 생명의 비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 낙엽이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며 그의 무거운 번뇌(煩惱)를 걷어가는 것만 같았다. 개창만려청, 병골욕생우! (開窓萬慮淸, 病骨欲生羽!) 창을 활짝 열자마자, 마음을 짓누르던 모든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동안 무겁기만 했던 병든 몸(病骨)에 날개(羽)가 돋을 것만 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의 눈에 비친 낙엽은 단순한 죽음의 상징이 아니었다. 낙엽(落葉)은 흔히 소멸(消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인데, 남효온(南孝溫)에게 있어 낙엽(落葉)은 그저 시들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생명의 순환(生命循環)을 품은 신령한 존재였다. 낡고 묵은 잎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면, 그 빈 공간에는 새 생명이 다시금 숨을 틔운다. 그렇게 신령이 내리는 비 같은 낙엽들이 그의 마음의 응어리를 씻어가니, 어찌 기운이 나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自然)은 이런 깊은 철학(哲學)을 품고 있다. 낙엽(落葉)은 지지만, 생명은 영원(永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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