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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회 등애가 지혜로써 강유를 이기고, 제갈탄이 의롭게 사마소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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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百一十一回

鄧士載智敗薑伯約 諸葛誕義討司馬昭

 

111

등애가 지혜로써 강유를 이기고, 제갈탄이 의롭게 사마소를 치다.

 

卻說薑維退兵屯於鍾提魏兵屯於狄道城外王經迎接陳泰鄧艾入城拜謝解圍之事設宴相待大賞三軍泰將鄧艾之功申奏魏主曹髦髦封艾爲安西將軍假節領護東羌校尉同陳泰屯兵於雍涼等處鄧艾上表謝恩畢陳泰設席與鄧艾作賀曰薑維夜遁其力已竭不敢再出矣艾笑曰吾料蜀兵必出有五

 

한편, 강유가 퇴각하여 종제에 주둔하고 위나라 군사는 적도성 밖에 주둔했다. 왕경이 진태와 등애를 영접하여 입성한 뒤 포위를 풀어준 것을 사례하며, 연회를 열어 대접하고 전군을 크게 포상했다. 진태가 등애의 공을 위나라 군주 조모에게 아뢰었다. 조모가 등애를 안서장군 가절 영호동강교위(황제의 부절을 지니고 강족을 막는 군 사령관)로 봉하여 진태와 함께 옹주와 양주 등지에 주둔하게 했다. 등애가 조모에게 표를 올려 성은에 감사한 뒤, 진태가 등애에게 연회를 베풀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강유가 밤에 달아나 그 힘이 이미 바닥났으니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오.”

 

했다. 등애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촉나라 군이 반드시 다시 나올 것인데 그 까닭이 다섯 가지는 되오.”

 

했다.

 

泰問其故艾曰蜀兵雖退終有乘勝之勢吾兵終有弱敗之實其必出一也蜀兵皆是孔明教演精銳之兵容易調遣吾將不時更換軍又訓練不熟其必出二也蜀人多以船行吾軍皆在旱地勞逸不同其必出三也狄道隴西南安祁山四處皆是守戰之地蜀人或聲東擊西指南攻北吾兵必須分頭守把蜀兵合爲一處而來以一分當我四分其必出四也若蜀兵自南安隴西則可取羌人之穀爲食若出祁山則有麥可就食其必出五也陳泰歎服曰公料敵如神蜀兵何足慮哉於是陳泰與鄧艾結爲忘年之交艾遂將雍涼等處之兵每日操練各處隘口皆立營寨以防不測

 

진태가 그 까닭을 물으니, 등애가 말하기를,

 

촉나라 군은 비록 퇴각하였으나 마지막까지 승리의 여세를 탈 힘이 남아 있었고, 아군은 패배한 실정이니, 그들이 반드시 출병할 첫 번째 까닭이오. 촉나라 군은 모두가 제갈공명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아서 정예한 병력이고 배치가 용이하지만, 아군은 수시로 교체되고 훈련도 충분하지 못하니, 그들이 반드시 출병할 두 번째 까닭이오. 촉나라 사람들은 배를 타고 움직이는 때가 많지만, 아군은 모두 육지에서 움직여서 그 노고와 편안함이 같지 않으니, 그들이 반드시 출병할 세 번째 까닭이오. 적도, 농서, 남안, 기산 이들 네 곳은 모두 방어전을 치르는 곳이라서 촉나라 군이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침) 지남공북(指南攻北 남쪽을 치는 척하면서 북쪽을 공격함)이라도 하면, 아군은 병력을 분산하여 지켜야 할 것이오. 촉나라 군이 한데 합쳐서 오면 그들의 한 부분으로 아군의 네 부분을 감당할 수 있으니 그들이 반드시 출병할 네 번째 까닭이오. 만약 촉나라 군이 남안과 농서에서 온다면 강인들의 곡식을 취하여 군량으로 삼을 수 있고, 기산으로 출병한다면 그곳의 보리를 군량으로 삼을 수 있으니, 이것이 그들이 반드시 출병할 다섯 번째 까닭이오.”

 

했다. 진태가 탄복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적병을 귀신처럼 헤아리고 있으니 촉나라 군사를 어찌 족히 염려하겠소!”

 

했다. 이에 진태와 등애가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 차이를 넘어선 교제)를 맺었다. 등애가 곧 옹주와 양주 등지의 군사를 매일 훈련하고, 곳곳의 요충지에 모두 영채를 세워서 적군의 기습을 방비했다.

 

卻說薑維在鍾提大設筵宴會集諸將商議伐魏之事令史樊建諫曰將軍屢出未獲全功今日洮西之捷魏人已服威名何故又欲出也萬一不利前功盡棄維曰汝等只知魏國地寬人廣急不可得卻不知攻魏者有五可勝衆問之維答曰彼洮西一敗挫盡銳氣吾兵雖退不曾損折今若進兵一可勝也吾兵船載而進不致勞困彼兵皆從旱地來迎二可勝也吾兵久經訓練之衆彼皆烏合之徒不曾有法度三可勝也吾兵自出祁山掠抄秋穀爲食四可勝也彼兵須各守備軍力分開吾兵一處而去彼安能救五可勝也不在此時伐魏更待何日耶

 

한편, 강유는 종제에서 크게 연회를 베풀어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위나라 정벌을 상의했다. 영사(태위부 관리) 번건이 간하기를,

 

장군께서 여러 번에 걸쳐 출병하셨지만 여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가 요전에 도서에서 승리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장군의 위명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다시 출병하려 하십니까? 만일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앞의 공적이 모조리 무너질 것입니다.”

 

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위나라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쉽게 정벌할 수 없는 줄로만 알고 있소. 그러나 위나라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승리할 다섯 가지 까닭이 있는 것을 모르는구려.”

 

했다. 사람들이 물으니 강유가 대답하기를,

 

그들은 도서의 싸움에서 한번 패하여 예기가 모조리 꺾였소. 아군이 비록 퇴각하였으나 아무런 손실이 없었으니, 이제 만약 진군하면 승리할 첫 번째 까닭이오. 아군이 배를 타고 진군하면 지치지 않을 것이고, 적군은 육로로 올 테니 아군이 승리할 두 번째 까닭이오. 아군은 오랜 기간 훈련을 쌓았지만, 적군은 모두 오합지졸이고 아직 법도도 없으니, 아군이 승리할 세 번째 까닭이오. 아군이 기산에서 나가면 가을 곡식을 거둬서 군량으로 삼을 수 있으니, 아군이 승리를 거둘 네 번째 까닭이오. 적군이 곳곳에서 수비를 하고 있으나, 그들의 군사력이 나뉘어 있고, 아군은 한데 모여서 갈 것이니, 적군이 어찌 서로 구원하겠소? 이것이 아군이 승리할 다섯 번째 까닭이오. 이 기회에 위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다시 언제를 기다려야겠소?”

 

했다.

 

夏侯霸曰艾年雖幼而機謀深遠近封爲安西將軍之職必於各處准備非同往日矣維厲聲曰吾何畏彼哉公等休長他人銳氣滅自己威風吾意已決必先取隴西衆不敢諫維自領前部令衆將隨後而進於是蜀兵盡離鍾提殺奔祁山來哨馬報說魏兵已先在祁山立下九個寨柵維不信引數騎憑高望之果見祁山九寨勢如長蛇首尾相顧維回顧左右曰夏侯霸之言信不誣矣此寨形勢絕妙止吾師諸葛丞相能之今觀鄧艾所爲不在吾師之下

 

하후패가 말하기를,

 

등애가 비록 젊으나 그 계략이 심원하오. 최근에 안서장군의 직위에 봉해져서 틀림없이 곳곳에 준비할 테니 지난날과 같지 않을 것이오.”

 

하니, 강유가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따위를 두려워하겠소! 여러분은 타인의 예기를 높이고 자기의 위풍을 낮추지 마시오! 내 뜻은 이미 결정됐소. 반드시 농서를 먼저 취하겠소.”

 

하니, 사람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했다. 이에 강유가 스스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장수들에게 뒤따라 진군하라고 했다. 촉나라 군이 모두 종제를 떠나 기산으로 달려갔다. 정찰 기병이 보고하기를, 위나라군이 이미 기산에 아홉 개의 영채를 세웠다고 하지만, 강유가 믿지 않고 몇 기를 이끌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았다. 과연 기산의 아홉 개 영채가 마치 기다란 뱀과 같이 그 머리와 꼬리가 서로 보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강유가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하후패의 말이 참으로 과장이 아니구나. 이들 영채의 형세가 절묘하니 오로지 내 스승 제갈 승상만이 능히 이렇게 할 것이다. 지금 등애가 해놓은 것을 보니 내 스승의 아래에 있지 않다.”

 

했다.

 

遂回本寨喚諸將曰魏人既有准備必知吾來矣吾料鄧艾必在此間汝等可虛張吾旗號據此穀口下寨每日令百餘騎出哨每出哨一回換一番衣甲旗號按青黑五方旗幟相換吾卻提大兵偷出董亭徑襲南安去也遂令鮑素屯兵於祁山穀口維盡率大兵望南安進發卻說鄧艾知蜀兵出祁山早與陳泰下寨准備見蜀兵連日不來搦戰一日五番哨馬出寨或十裏或十五裏而回

 

곧 본진으로 돌아와 여러 장수를 불러 말하기를,

 

위나라 군이 이미 준비를 마쳤소. 그들은 내가 반드시 올 것을 알았소. 내가 보기에, 틀림없이 등애가 이곳에 있소. 그대들은 아군의 깃발로 허장성세를 펼쳐, 이 골짜기 입구에 영채를 세우고, 매일 1백여 기병에게 경계를 하러 나가게 하고, 한번 경계를 나갈 때마다 한 번씩 갑옷을 갈아입게 하시오. 깃발을 청, , , , 흑의 다섯 가지로 마련하여 서로 바꾸시오. 나는 비밀리에 대군을 거느리고 동정을 나가서 지름길로 남안을 습격하러 가겠소.”

 

하고, 곧 포소에게 기산 골짜기 어귀에 주둔하라 하고, 강유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남안을 향하여 진군했다. 한편, 등애는 촉나라 군이 기산으로 나온 것을 알고, 재빨리 진태와 더불어 영채를 세워 대비했다. 그런데 촉나라 군이 며칠이 지나도록 싸움을 걸어 오지 않고, 매일 다섯 차례 정찰 기병들이 영채를 나와서 10리 혹은 20리를 나갔다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艾憑高望畢慌入帳與陳泰曰薑維不在此間必取董亭襲南安去了出寨哨馬只是這幾匹更換衣甲往來哨探其馬皆困乏主將必無能者陳將軍可引一軍攻之其寨可破也破了寨柵便引兵襲董亭之路先斷薑維之後吾當先引一軍救南安徑取武城山若先占此山頭薑維必取上邽上邽有一穀名曰段穀地狹山險正好埋伏彼來爭武城山時吾先伏兩軍於段穀破維必矣泰曰吾守隴西二三十年未嘗如此明察地理公之所言真神算也公可速去吾自攻此處寨柵

 

등애가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더니, 허겁지겁 막사로 들어와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가 이곳에 있지 않으니 틀림없이 동정을 취하여 남안을 습격하러 갔을 것이오. 영채를 나오는 정찰 기병들은 몇 필 되지 않는데 갑옷을 갈아입고 오고 가며 경계하느라 모두 지쳐 있을 것이고 지휘관은 무능한 자가 틀림없소. 진 장군께서 한 무리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면 그 영채를 깨뜨릴 수 있소. 촉나라 영채를 깨뜨린 뒤 곧 군사를 이끌고 동정을 지나는 길을 습격하여 먼저 강유의 후미를 끊으시오. 나는 앞장서서 한 무리 군사를 이끌고 남안을 구원하고 곧바로 무성산으로 가겠소. 무성산 꼭대기를 선점하면 강유는 틀림없이 상규로 갈 것이오. 상규에 골짜기가 하나 있으니 이름이 단곡인데, 땅이 협소하고 산이 험준하여 매복하기 아주 좋소. 그가 무성산을 치러 오면, 나는 두 무리 군사를 단곡에 먼저 매복하여 강유를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진태가 말하기를,

 

내가 농서를 2, 30년 지켰으나 아직까지 이렇게 지리를 잘 알지 못했소. 공의 말씀은 참으로 귀신 같은 계략이오. 공은 어서 떠나시오. 나도 이곳의 영채를 공격하러 가겠소.”

 

했다.

 

於是鄧艾引軍星夜倍道而行徑到武城山下寨已畢蜀兵未到即令子鄧忠與帳前校尉師纂各引五千兵先去段穀埋伏如此如此而行二人受計而去艾令偃旗息鼓以待蜀兵卻說薑維從董亭望南安而來至武城山前謂夏侯霸曰近南安有一山名武城山若先得了可奪南安之勢只恐鄧艾多謀必先提防

 

이에 등애가 군사를 이끌고 밤새 길을 재촉하여 곧바로 무성산에 이르렀다. 영채를 세운 뒤 촉나라 군이 아직 오지 않아서, 곧 아들 등충과 장전교위 사찬에게 명하여 각각 군사 5천을 이끌고 먼저 단곡으로 가서 매복하라 하고 이러저러하게 지시했다. 두 사람이 계책을 받고 떠났다. 등애가 깃발을 누이고 북소리를 내지 않게 명하고 촉나라 군을 기다렸다. 한편, 강유는 동정에서 남안으로 오다가 무성산 앞에 이르러 하후패에게 말하기를,

 

남안 가까이에 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무성산이오. 먼저 점령하면 남안을 빼앗을 수 있는 형세가 될 것이오. 다만 등애가 모략이 많으니 반드시 먼저 방비해야 하오.”

 

했다.

 

正疑慮間忽然山上一聲炮響喊聲大震鼓角齊鳴旌旗遍豎皆是魏兵中央風飄起一黃旗大書鄧艾字樣蜀兵大驚山上數處精兵殺下勢不可當前軍大敗維急率中軍人馬去救時魏兵已退維直來武城山下搦鄧艾戰山上魏兵並不下來維令軍士辱罵至晚方欲退軍山上鼓角齊鳴卻又不見魏兵下來維欲上山沖殺山上炮石甚嚴不能得進守至三更欲回山上鼓角又鳴維移兵下山屯紥比及令軍搬運木石方欲豎立爲寨山上鼓角又鳴魏兵驟至蜀兵大亂自相踐踏退回舊寨

 

이렇게 우려하는 사이에, 갑자기 산 위에서 한 번 포성이 울리더니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일제히 울리며 깃발이 사방에서 일어서는데 모두가 위나라 군사였다. 중앙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황색 깃발에 "등애"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촉나라 군사가 크게 놀랐다. 산 위 여러 곳에서 정예병이 아래로 달려드니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촉나라 선두 부대가 대패했다. 강유가 급히 중군의 인마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갔을 때 위나라 군사는 이미 퇴각했다. 강유가 곧바로 무성산 아래로 가서 등애에게 싸움을 걸지만, 산 위의 위나라 군사는 전혀 내려오지 않았다. 강유가 군사들을 시켜 저녁까지 욕을 퍼붓다가 비로소 군사를 물리려 하자 산 위에서 북과 피리가 일제히 울렸다. 그러나 위나라군이 내려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유가 산을 올라 들이쳐서 죽이려 하나 산 위에서 포로 쏘는 돌이 몹시 맹렬하여 전진할 수가 없었다. 3경까지 지키다가 돌아가려 하자 다시 산 위에서 북과 피리가 울렸다. 강유가 군사들을 이동시켜 산을 내려가 영채를 세워 주둔하게 했다. 군사들을 시켜 나무와 돌을 운반하여 영채를 세우려 하자 산 위에서 북과 피리가 다시 울리고, 위나라군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촉나라 군사가 크게 혼란하여 서로 짓밟으며 이전의 영채로 후퇴했다.

 

次日薑維令軍士運糧草車仗至武城山穿連排定欲立起寨柵以爲屯兵之計是夜二更鄧艾令五百人各執火把分兩路下山放火燒車仗兩兵混殺了一夜營寨又立不成維複引兵退再與夏侯霸商議曰南安未得不如先取上邽上邽乃南安屯糧之所若得上邽南安自危矣遂留霸屯於武城山維盡引精兵猛將徑取上邽行了一宿將及天明見山勢狹峻道路崎嶇乃問向導官曰此處何名答曰段穀維大驚曰其名不美段穀斷穀倘有人斷其穀口如之奈何

 

다음날, 강유가 군사들을 시켜 군량과 사료, 수레와 병장기를 무성산까지 운반했다. 이것들을 한 줄로 연결하여 영채를 세우고 군사를 주둔시킬 계책이었다. 이날 밤 2(10시쯤)에 등애가 5백 명에게 명하여 각자 횃불을 들고 양 갈래로 산을 내려가 촉나라의 수레와 병장기에 불을 지르게 했다. 양쪽 군사가 밤새 혼전을 벌여서 영채를 세우지 못했다.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다시 하후패와 상의하며 말하기를,

 

남안을 아직 빼앗지 못했으니 상규를 먼저 취해야겠소. 상규는 곧 남안의 군량을 저장하는 곳이라 만약 상규를 빼앗으면 남안은 저절로 위태로울 것이오.”

 

하고, 곧 하후패를 무성산에 남겨두고 강유가 정병과 맹장을 모조리 이끌고 상규를 치러 갔다. 도중에 하룻밤을 자고 날이 밝아 살펴보니 산세가 좁고 험준한데다 도로가 구불구불하여 길을 안내하는 관리에게 묻기를,

 

이곳의 지명이 무엇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단곡입니다.”

 

했다. 강유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그 이름이 불길하구나. 단곡은 끊어지는 골짜기이오. 만약 적군이 그 골짜기 입구를 끊는다면 어찌하겠소?”

 

했다.

 

正躊躇未決忽前軍來報山後塵頭大起必有伏兵維急令退兵師纂鄧忠兩軍殺出維且戰且走前面喊聲大震鄧艾引兵殺到三路夾攻蜀兵大敗幸得夏侯霸引兵殺到魏兵方退救了薑維欲再往祁山霸曰祁山寨已被陳泰打破鮑素陣亡全寨人馬皆退回漢中去了維不敢取董亭急投山僻小路而回後面鄧艾急追維令諸軍前進自爲斷後

 

이렇게 멈칫거리고 결정하지 못하는데, 갑자기 선두 부대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산 뒤에 먼지가 크게 일어나니 반드시 복병이 있습니다." 했다. 강유가 급히 퇴각을 명했다. 사찬과 등충의 두 부대가 달려나왔다. 강유가 싸우면서 달아나는데 앞쪽에서 함성이 크게 울리며 등애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세 방면으로 협공하니 촉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다행히 하후패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자 위나라군이 물러가고 하후패가 강유를 구하니, 강유가 다시 기산으로 나가려 하는데 하후패가 말하기를,

 

기산의 영채는 이미 진태에게 파괴되어 포소가 전사하고 영채의 인마가 모두 한중으로 퇴각했소.”

 

했다. 강유가 감히 동정으로 가지 못하고 급히 산속 외진 길을 따라 회군했다. 그 뒤를 등애가 급히 추격하자 강유가 군사들더러 전진하라 하고 스스로 후미를 엄호했다.

 

正行之際忽然山中一軍突出乃魏將陳泰也魏兵一聲喊起將薑維困在垓心維人馬困乏左沖右突不能得出蕩寇將軍張嶷聞薑維受困引數百騎殺入重圍維因乘勢殺出嶷被魏兵亂箭射死維得脫重圍複回漢中因感張嶷忠勇歿於王事乃表贈其子孫於是蜀中將士多有陣亡者皆歸罪於薑維維照武侯街亭舊例乃上表自貶爲後將軍行大將軍事

 

이렇게 가고 있는데, 홀연히 산속에서 1군이 돌출하니 바로 위나라 장수 진태였다. 위나라 군사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강유를 포위 가운데에 빠뜨렸다. 강유가 사람과 말이 지친 채 좌충우돌(左衝右突)하지만 탈출하지 못했다. 탕구장군 장의가, 강유가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수백 기를 이끌고 여러 겹 포위를 뚫고 들어가니, 강유가 그 틈을 타서 탈출했다. 그러나 장의는 위나라 군사들의 어지러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강유는 겹친 포위를 벗어나 다시 한중으로 돌아와서, 장의가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나라의 일을 위해 죽은 것에 감동하여, 후주에게 표를 올려 그 자손을 돕게 했다. 이에 촉나라 장졸들 다수가 전사한 것이 모두 강유의 죄로 귀책되었다. 강유는 무후(제갈량)가 가정의 패전 뒤에 책임을 졌던 옛 사례를 본받아 후주에게 표를 올려, 스스로를 후장군으로 강등하여 대장군의 업무를 수행했다.

 

卻說鄧艾見蜀兵退盡乃與陳泰設宴相賀大賞三軍泰表鄧艾之功司馬昭遣使持節加艾官爵賜印綬並封其子鄧忠爲亭侯時魏主曹髦改正元三年爲甘露元年司馬昭自爲天下兵馬大都督出入常令三千鐵甲驍將前後簇擁以爲護衛一應事務不奏朝廷就於相府裁處自此常懷篡逆之心有一心腹人姓賈名充字公閭乃故建威將軍賈逵之子爲昭府下長史充語昭曰今主公掌握大柄四方人心必然未安且當暗訪然後徐圖大事昭曰吾正欲如此汝可爲我東行只推慰勞出征軍士爲名以探消息

 

한편, 등애는 촉나라 군사가 모두 퇴각하자, 진태와 더불어 연회를 베풀어 축하하고, 전군에 크게 상을 주었다. 진태가 등애의 공을 조정에 상주하니, 사마소가 사자에게 절부(신임 증표)를 주어 보내서, 등애의 벼슬을 더하고 도장과 끈을 하사했다. 등애의 아들 등충도 정후로 봉했다. 이때 위나라 군주 조모가 정원 3년을 감로 원년으로 바꾸었다. 사마소가 스스로 천하병마대도독이 되고 출입할 때마다 3천 철갑 장수들로 하여금 앞뒤를 에워싸 호위하게 했다. 일체의 사무를 조정에 상주하지 않고 재상의 관저에서 처리했다. 이로부터 항상 (황제 자리를) 찬탈할 마음을 품었다. 그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 있는데, 성이 가이고, 이름은 충이며, 자가 공려라는 이가 있는데 바로 옛 건위장군 가규의 아들로서 사마소의 대도독부 장사(비서장)로 있었다. 가충이 사마소에게 말하기를,

 

이제 주공께서 대권을 장악하셨지만, 사방의 인심이 반드시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몰래 조사한 뒤에 서서히 대사를 도모해야 합니다.”

 

하니, 사마소가 말하기를,

 

나도 그러려고 했소. 그대는 나를 위하여 동쪽으로 가서 출정 군사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사정을 탐색해 보시오.”

 

했다.

 

賈充領命徑到淮南入見鎮東大將軍諸葛誕誕字公休乃琅琊南陽人即武侯之族弟也向事於魏因武侯在蜀爲相因此不得重用後武侯身亡誕在魏曆任重職封高平侯總攝兩淮軍馬當日賈充托名勞軍至淮南見諸葛誕誕設宴待之酒至半酣充以言挑誕曰近來洛陽諸賢皆以主上懦弱不堪爲君司馬大將軍三輩輔國功德彌天可以禪代魏統未審鈞意若何誕大怒曰汝乃賈豫州之子世食魏祿安敢出此亂言充謝曰某以他人之言告公耳誕曰朝廷有難吾當以死報之充默然次日辭歸見司馬昭細言其事昭大怒曰鼠輩安敢如此充曰誕在淮南深得人心久必爲患可速除之

 

가충이 명을 받고 곧바로 회남으로 가서, 진동대장군 제갈탄을 만나러 들어갔다. 제갈탄은 자가 공휴이고 낭야군 남양현 출신으로 무후(제갈량)의 종족 아우다. 예전부터 위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무후가 촉나라의 승상이 된 까닭에 제갈탄은 중용되지 못했다. 그 뒤 무후가 사망하니 제갈탄이 중요 직책을 역임하고 고평후에 봉해져 양회(회남과 회북)의 군마를 모두 거느렸다. 이날 가충이 군사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회남에 이르러 제갈탄을 만났다. 제갈탄에 연회를 베풀어 대접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가충이 말로 제갈탄을 도발하기를,

 

근래에 낙양의 여러 현명한 인사들이 모두 주상이 유약하여 군주의 지위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오. 사마 대장군은 삼대에 걸쳐서 국정을 보필하고 공덕이 하늘에 닿아 가히 위나라의 법통을 선양 받을 만하오. 공의 뜻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소.”

 

하니,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가예주(가규)의 아들로서 대대로 위나라에서 녹을 먹었거늘 어찌 감히 이런 어지러운 말을 하시오!”

 

했다. 가충이 사과하기를,

 

저는 다만 다른 이의 말씀을 전한 것뿐이오.”

 

하니, 제갈탄이 말하기를,

 

조정에 어려움이 닥친다면 나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했다. 가충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서 사마소를 만나 그 일을 자세히 말하니, 사마소가 크게 노해 말하기를,

 

쥐새끼가 어찌 감히 이러하냐!”

 

했다. 가충이 말하기를,

 

제갈탄이 회남에서 인심을 깊이 얻어서 먼 훗날 우환이 될 것이니 어서 제거하십시오.”

 

했다.

 

昭遂暗發密書與揚州刺史樂綝一面遣使齎詔征誕爲司空誕得了詔書已知是賈充告變遂捉來使拷問使者曰此事樂綝知之誕曰他如何得知使者曰司馬將軍已令人到揚州送密書與樂綝矣誕大怒叱左右斬了來使遂起部下兵千人殺奔揚州來將至南門城門已閉吊橋拽起誕在城下叫門城上並無一人回答誕大怒曰樂綝匹夫安敢如此遂令將士打城手下十餘驍騎下馬渡壕飛身上城殺散軍士大開城門於是諸葛誕引兵入城乘風放火殺至綝家綝慌上樓避之誕提劍上樓大喝曰汝父樂進昔日受魏國大恩不思報本反欲順司馬昭耶

 

사마소가 곧 몰래 밀서를 양주자사 악침에게 보냈다. 한편으로 사자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제갈탄을 사공을 삼는다고 조정으로 불렀다. 제갈탄이 조서를 받고, 이것이 가충이 변란을 고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곧 사자를 고문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이 일은 악침도 알고 있소.”

 

했다. 제갈탄이 말하기를,

 

그가 어떻게 알았지?”

 

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사마 장군이 이미 사람을 양주로 보내어 밀서를 악침에게 주었소.”

 

했다.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좌우에게 호통쳐서 사자를 참하고, 곧 부하 군사 1천을 일으켜 양주로 달려갔다. 남문에 이르니 성문은 이미 닫혔고, 적교(해자를 건너 성문과 연결되는 다리)는 끌어올려졌다. 제갈탄에 성 밑에서 문을 열라고 외치지만 성 위에서 아무도 회답하지 않았다.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악침 필부놈아!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고, 곧 장졸들을 시켜 성을 공격하게 했다. 제갈탄 수하의 기마병 십여 명이 말에서 내려 해자를 건너 몸을 날려 성을 오르더니 군사들을 내쫓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이에 제갈탄이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불을 지르니 악침의 집까지 거세게 번졌다. 악침이 황급히 누각 위에 올라 불을 피했다. 제갈탄이 검을 들고 누각에 올라가 크게 꾸짖기를,

 

네 부친 악진은 지난날 위나라의 큰 은혜를 받았다!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은 않고, 도리어 사마소를 따르려고 한다는 말이냐!”

 

했다.

 

綝未及回言爲誕所殺一面具表數司馬昭之罪使人申奏洛陽一面大聚兩淮屯田戶口十餘萬並揚州新降兵四萬餘人積草屯糧准備進兵又令長史吳綱送子諸葛靚入吳爲質求援務要合兵誅討司馬昭此時東吳丞相孫峻病亡從弟孫綝輔政綝字子通爲人強暴殺大司馬滕胤將軍呂據王惇等因此權柄皆歸於綝吳主孫亮雖然聰明無可奈何於是吳綱將諸葛靚至石頭城入拜孫綝綝問其故綱曰諸葛誕乃蜀漢諸葛武侯之族弟也向事魏國今見司馬昭欺君罔上廢主弄權欲興師討之而力不及故特來歸降誠恐無憑專送親子諸葛靚爲質伏望發兵相助

 

악침이 미처 답하지 못하고 제갈탄에게 살해되었다. 한편으로 사마소의 죄를 열거하는 표를 써서, 이를 사자에게 주어 낙양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상주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 회남과 회북의 둔전(변경이나 군사 요지에서 군량을 위해 경작하는 토지)을 일구는 사람들 십만 남짓과 아울러 양주에서 새로 항복한 병사 4만여 명을 크게 모아서 진군을 준비했다. 또한 장사(비서장) 오강을 시켜 아들 제갈정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오나라와 군사를 합쳐서 기필코 사마소를 토벌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동오의 승상 손준이 병사하고 그의 사촌 동생 손침이 국정을 보좌하고 있었다. 손침은 자가 자통인데 사람됨이 흉포하여 대사마 등윤, 장군 여거, 왕돈 등을 살해하니, 이로 인해 손침이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오나라 임금 손량이 비록 총명하다고 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오강이 제갈정을 데리고 석두성(건업)에 이르러 손침을 만나러 들어갔다. 손침이 사연을 물으니 오강이 말하기를,

 

제갈탄은 촉한의 제갈무후(제갈량)의 종족 아우입니다. 지난날 위나라를 섬겼으나 이제 사마소가 임금을 기만하며 군주를 폐하고 권력을 농단함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합니다. 그러나 힘에 부친 까닭에 특별히 와서 귀순하려 하니, 아무런 보증이 없다고 하실까 참으로 걱정하여 친아들 제갈정을 인질로 보내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군사를 내어서 도와주십시오.”

 

했다.

 

綝從其請便遣大將全懌全端爲主將於詮爲合後朱異唐咨爲先鋒文欽爲向導起兵七萬分三隊而進吳綱回壽春報知諸葛誕誕大喜遂陳兵准備卻說諸葛誕表文到洛陽司馬昭見了大怒欲自往討之賈充諫曰主公乘父兄之基業恩德未及四海今棄天子而去若一朝有變悔之何及不如奏請太後及天子一同出征可保無虞昭喜曰此言正合吾意遂入奏太後曰諸葛誕謀反臣與文武官僚計議停當請太後同天子禦駕親征以繼先帝之遺意太後畏懼只得從之

 

손침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곧 대장 전역과 전단을 주장으로 삼고, 우전을 합후(후군), 주이와 당자를 선봉으로, 문흠을 향도(길 안내)로 삼아 군사 7만을 일으켜 세 부대로 나누어 진군했다. 오강이 수춘으로 돌아와 제갈탄에게 보고했다. 제갈탄이 크게 기뻐하며 곧 포진하여 준비했다. 한편, 제갈탄의 표문이 낙양에 이르자, 사마소가 이를 보고 크게 노하여 직접 토벌하러 가려고 했다. 가충이 간하기를,

 

주공께서 아버지와 형의 정권을 이어받았지만, 그 은덕이 아직 사해(온 세상)에 미치지 않았는데, 이제 천자를 버려두고 가셨다가 만약 하루아침에 변고가 생긴다면 후회한들 어찌하시겠습니까? 태후와 천자께 함께 출정할 것을 주청하여 걱정거리를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했다. 사마소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 말이 참으로 내 뜻과 같소.”

 

하고, 곧 입궐하여 태후에게 주청하기를,

 

제갈탄이 모반하니 신과 문무 관료가 토의를 마쳤습니다. 청컨대 태후께서 천자와 함께 어가를 타고 친히 정벌하심으로써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이으소서.”

 

했다. 태후가 두려워서 이를 따를 뿐이었다.

 

次日昭請魏主曹髦起程髦曰大將軍都督天下軍馬任從調遣何必朕自行也昭曰不然昔日武祖縱橫四海文帝明帝有包括宇宙之志並吞八荒之心凡遇大敵必須自行陛下正宜追配先君掃清故孽何自畏也髦畏威權只得從之昭遂下詔盡起兩都之兵二十六萬命鎮南將軍王基爲正先鋒安東將軍陳騫爲副先鋒監軍石苞爲左軍兗州刺史州泰爲右軍保護車駕浩浩蕩蕩殺奔淮南而來

 

다음날, 사마소가 위나라 군주 조모에게 길을 떠날 것을 청하니, 조모가 말하기를,

 

대장군께서 천하의 군마를 모두 거느려서 마음대로 조치할 수 있거늘 하필 짐이 직접 가야겠소?”

 

했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 할아버지 무제(조조)께서 사해를 종횡무진하시고 문제(조비)와 명제(조예)께서 우주를 포괄하는 뜻과 팔황(천하)을 병탄하는 마음을 지녀서 무릇 큰 적과 마주치면 반드시 스스로 가셨습니다. 폐하께서 마땅히 선군(선대의 제왕)들을 본받아 오랜 적수를 소탕하셔야지 어찌 두려워하십니까?”

 

했다. 조모가 위세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사마소가 곧 조서를 내려 두 도읍의 군사 26만을 모두 일으겼다. 진남장군 왕기를 선봉으로, 안동장군 진건을 부선봉으로, 감군 석포를 좌군으로, 연주자사 주태를 우군으로 삼아, 어가를 보호하며,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회남으로 달려왔다.

 

東吳先鋒朱異引兵迎敵兩軍對圓魏軍中王基出馬朱異來迎戰不三合朱異敗走唐咨出馬戰不三合亦大敗而走王基驅兵掩殺吳兵大敗退五十裏下寨報入壽春城中諸葛誕自引本部銳兵會合文欽並二子文鴦文虎雄兵數萬來敵司馬昭正是方見吳兵銳氣墮又看魏將勁兵來

 

동오의 선봉 주이가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여,양쪽 군대가 전열을 갖추자 위나라 군중에서 왕기가 출마하고 주이가 맞서려고 나왔다. 싸운 지 3합이 되지 않아서 주이가 패주하니 당자가 출마하지만 역시 3합을 못 싸우고 크게 져서 달아났다. 왕기가 군사를 몰아서 엄습하니 오나라 군이 대패하여 50리를 퇴각하여 영채를 세우고 수춘성 안으로 알리러 들어갔다. 제갈탄이 휘하의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문흠과 그의 두 아들 문앙과 문호, 그들 휘하의 강한 군대 수만과 합류하여 사마소와 맞서러 왔다. 이야말로, 방금 오나라 군사의 예기가 무너졌는데, 다시 위나라 장수가 강병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네.

 

未知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승부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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