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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회 정봉이 눈 속에서 단도를 들고 돌격하고, 손준이 연회에서 비밀 계책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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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百十八回

丁奉雪中奮短兵 孫峻席間施密計三國志演義

 

108

정봉이 눈 속에서 단도를 들고 돌격하고, 손준이 연회에서 비밀 계책을 쓰다.

 

卻說薑維正走遇著司馬師引兵攔截原來薑維取雍州之時郭淮飛報入朝魏主與司馬懿商議停當懿遣長子司馬師引兵五萬前來雍州助戰師聽知郭淮敵退蜀兵師料蜀兵勢弱就來半路擊之直趕到陽平關卻被薑維用武侯所傳連弩法於兩邊暗伏連弩百餘張一弩發十矢皆是藥箭兩邊弩箭齊發前軍連人帶馬射死不知其數司馬師於亂軍之中逃命而回

 

한편, 강유가 달아나고 있는데 사마사가 군사를 이끌고 가로막았다. 원래 강유가 옹주를 공격할 때 곽회가 조정에 급보했다. 이에 위나라 임금이 사마의와 상의한 끝에 사마의가 장자 사마사를 보내어 군사 5만을 이끌고 옹주로 가서 싸움을 돕게 했다. 사마사는 곽회가 촉나라 군사를 격퇴하자, 촉나라 군세가 약하다고 여겨 도중에 공격했다. 양평관까지 바로 추격하자 강유가 무후(공명)에게서 전수받은 연노법으로 양쪽에 연발 쇠뇌 1백여 개를 매복하여, 쇠뇌 1개로 화살 10발을 발사하니, 모두 독화살이었다. 양쪽에서 연발 쇠뇌로 일제 사격하자 선두 대열에서 사람과 말이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이 부지기수였다. 사마사가 난군 속에서 겨우 목숨을 구하여 되돌아갔다.

 

卻說麹山城中蜀將句安見援兵不至乃開門降魏薑維折兵數萬領敗兵回漢中屯紥司馬師自還洛陽至嘉平三年秋八月司馬懿染病漸漸沉重乃喚二子至榻前囑曰吾事魏曆年官授太傅人臣之位極矣人皆疑吾有異志吾嘗懷恐懼吾死之後汝二人善理國政慎之慎之言訖而亡長子司馬師次子司馬昭二人申奏魏主曹芳芳厚加祭葬優錫贈諡封師爲大將軍總領尚書機密大事昭爲驃騎上將軍

 

한편, 국산의 성안에서 촉나라 장수 구안은 구원병이 오지 않자 성문을 열고 위나라에 투항했다. 강유가 군사 수만 명을 잃고 패잔병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사마사는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 가평 3년 가을 8월에 이르러 사마의가 병이 들어 점점 위중해지자 두 아들을 침상 앞으로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위나라를 섬긴 지 여러 해이고 관직이 태부에 이르니 인신의 지위로서 극에 달했다. 사람들 모두 내게 다른 뜻이 있다고 의심하니 나는 늘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너희 두 사람은 국정을 잘 처리해라.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했다. 말을 마치고 사망했다. 장자 사마사와 차자 사마소 두 사람이 위나라 임금 조방에게 이를 아뢰었다. 조방이 두터운 예로써 장례를 치르게 하고, 또한 크게 포상하고 시호를 추증했다. 사마사를 대장군 총령상서기밀대사(국사 총괄)로 봉하고 사마소를 표기상장군으로 봉했다.

 

卻說吳主孫權先有太子孫登乃徐夫人所生於吳赤烏四年身亡遂立次子孫和爲太子乃琅琊王夫人所生和因與全公主不睦被公主所譖權廢之和憂恨而死又立三子孫亮爲太子乃潘夫人所生此時陸遜諸葛瑾皆亡一應大小事務皆歸於諸葛恪太元元年秋八月初一日忽起大風江海湧濤平地水深八尺吳主先陵所種松柏盡皆拔起直飛到建業城南門外倒卓於道上權因此受驚成病至次年四月內病勢沉重乃召太傅諸葛恪大司馬呂岱至榻前囑以後事囑訖而薨在位二十四年壽七十一歲乃蜀漢延熙十五年也

 

한편, 오나라 임금 손권에게 먼저 태자 손등이 있었는데, 서 부인의 소생이었다. 그가 오나라 적오 4년에 사망하자, 차자 손화를 태자로 세우니, 낭야군 출신 왕 부인의 소생이었다. 손화(손권의 맏딸)가 전 공주와 화목하지 못하여 공주가 참소하니 손권이 그를 폐했다. 손화가 시름하고 한탄하다가 죽었다. 다시 셋째 아들 손량을 태자로 삼으니 바로 반 부인의 소생이었다. 이때 육손과 제갈근이 모두 죽고, 일체의 크고 작은 사무는 모두 제갈각에게 맡겨졌다. (오나라) 태원 원년 가을 8월 초하루에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강과 바다가 범람하여 평지가 깊이 8척의 물에 잠겼다. 오나라 군주가 선릉에 심었던 소나무와 잣나무가 모조리 뿌리뽑혀서 건업성의 남문 밖까지 날려와서 길 위에 거꾸로 섰다. 손권이 이 때문에 놀라서 병이 생겼다. 다음 해 4월 중에 병세가 위중해져 태부 제갈각과 대사마 여대를 침상 앞으로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부탁을 마치고 죽었다. 재위한 지 24년 나이 71세였다. 촉한 연희 15년의 일이었다.

 

後人有詩曰

 

紫髯碧眼號英雄

能使臣僚肯盡忠

二十四年興大業

龍盤虎踞在江東

 

뒷사람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자줏빛 수염과 파란 눈의 영웅이라 일컬으니,

능히 신하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게 만들었네.

이십사 년 동안 대업을 일으키니,

강동에 용과 호랑이처럼 터를 잡았네.”

 

했다.

 

孫權既亡諸葛恪立孫亮爲帝大赦天下改元建興元年諡權曰大皇帝葬於蔣陵早有細作探知其事報入洛陽司馬師聞孫權已死遂議起兵伐吳尚書傅嘏曰吳有長江之險先帝屢次征伐皆不遂意不如各守邊疆乃爲上策師曰天道三十年一變豈得常爲鼎峙乎吾欲伐吳昭曰今孫權新亡孫亮幼懦其隙正可乘也遂令征南大將軍王昶引兵十萬攻南郡征東將軍胡遵引兵十萬攻東興鎮南都督毋丘儉引兵十萬攻武昌三路進發又遣弟司馬昭爲大都督總領三路軍馬

 

손권이 죽자, 제갈각이 손량을 황제로 세우고,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연호를 대흥 원년으로 고쳤다. 손권에게 대황제의 시호를 바치고, 장릉에 안장했다. 어느새 세작이 그 일을 탐지하여 낙양에 들어가 알렸다. 사마사가 손권이 이미 죽었음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할 것을 의논했다. 상서 부하가 말하기를,

 

오나라는 장강이 험준하여 선제께서 누차 정벌하셨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제각기 변경을 지키는 것을 상책으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사마사가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30년에 한 번씩 변한다 했소. 어찌 항상 솥발처럼 대치할 수 있겠소? 나는 오나라를 정벌하겠소.”

 

했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이제 손권이 죽은 지 얼마 안 되고, 손량은 어리고 나약하니 이 틈을 타야 하오.”

 

했다. 마침내 정남대장군 왕창에게 명하여 군사 10만을 이끌고 남군을 치게 하고, 정동장군 호준에게 명하여 군사 10만을 이끌고 동흥을 치게 하며, 진남도독 관구검에게 명하여 군사 10만을 이끌고 무창을 치게 하여 세 방면으로 진군했다. 또한 (사마사의) 아우 사마소를 대도독으로 삼아 세 갈래의 군마를 총지휘하게 했다.

 

是年冬十二月司馬昭兵至東吳邊界屯住人馬喚王昶胡遵毋丘儉到帳中計議曰東吳最緊要處惟東興郡也今他築起大堤左右又築兩城以防巢湖後面攻擊諸公須要仔細遂令王昶毋丘儉各引一萬兵列在左右且勿進發待取了東興郡那時一齊進兵儉二人受令而去昭又令胡遵爲先鋒總領三路兵前去先搭浮橋取東興大堤若奪得左右二城便是大功遵領兵來搭浮橋

 

이해 겨울 12월에 사마소의 군사가 동오의 변경에 이르러 인마를 주둔시키고, 왕창, 호준, 관구검을 군막으로 불러들여 토의하며 말하기를,

 

동오에서 가장 긴요한 곳은 동흥군뿐이오. 이제 그들이 큰 둑을 쌓고 좌우에도 큰 성을 쌓아서 소호의 후면을 치는 것을 방비하고 있으니 공들께서 신중하게 작전하시오.”

 

했다. 곧 왕창과 관구검에게 명하여 각각 군사 1만을 이끌고 좌우에 포진하게 하고,

 

진격하지 말고 동흥군이 함락되기를 기다려서 그때 일제히 진군하시오.”

 

했다. 왕창과 관구검 두 사람이 명령을 받고 떠났다. 사마소가 또한 호준을 선봉으로 삼고 세 갈래의 병마를 총지휘하여 진군했다. (사마소가)

 

먼저 부교를 놓아 동흥군의 큰 둑을 점령하려 한다. 좌우의 두 성을 탈취하면 큰 공이 될 것이다.”

 

하니, 호준이 군사를 거느리고 부교를 놓으러 갔다.

 

卻說吳太傅諸葛恪聽知魏兵三路而來聚衆商議平北將軍丁奉曰東興乃東吳緊要處所若有失則南郡武昌危矣恪曰此論正合吾意公可就引三千水兵從江中去吾隨後令呂據唐咨留贊各引一萬馬步兵分三路來接應但聽連珠炮響一齊進兵吾自引大兵後至丁奉得令即引三千水兵分作三十只船望東興而來

 

한편, 오나라의 태부 제갈각이 위나라 군사가 세 갈래로 나눠 오는 것을 듣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상의하니, 평북장군 정봉이 말하기를,

 

동흥은 동오의 긴요한 곳이니 만약 잃는다면 곧 남군과 무장이 위태롭습니다.”

 

했다. 제갈각이 말하기를,

 

이 말씀이 내 생각과 같소. 공께서 수병 3천을 거느리고 강물을 따라가시오. 내가 뒤따라서 여거, 당자, 유찬에게 각각 마보군 1만을 이끌고 3로로 나누어 도우러 가라 하겠소. 연주포(연달아 터지는 포) 소리가 들리거든 일제히 진격하시오. 내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가겠소.”

 

했다. 정봉이 명령을 듣고 즉시 수병 3천을 이끌고 30척의 배에 나눠 타고 동흥으로 갔다.

 

卻說胡遵渡過浮橋屯軍於堤上差桓嘉韓綜攻打二城左城中乃吳將全端守把右城中乃吳將留略守把此二城高峻堅固急切攻打不下留二人見魏兵勢大不敢出戰死守城池胡遵在徐塘下寨時值嚴寒天降大雪胡遵與衆將設席高會忽報水上有三十只戰船來到遵出寨視之見船將次傍岸每船上約有百人遂還帳中謂諸將曰不過三千人耳何足懼哉只令部將哨探仍前飲酒丁奉將船一字兒拋在水上乃謂部將曰大丈夫立功名取富貴正在今日遂令衆軍脫去衣甲卸了頭盔不用長槍大戟止帶短刀魏兵見之大笑更不准備

 

한편, 호준은 부교를 건너서, 둑 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환가와 한종을 보내어 두 성을 치게 했다. 왼쪽 성은 오나라 장수 전단이 지켰고, 오른쪽 성은 오나라 장수 유략이 지켰다. 이 두 성은 높고 험준한데다 견고하여 거세게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단, 유략 두 사람은 위나라 군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성을 사수했다. 호준은 서당에 영채를 세웠다. 이때 날씨가 몹시 춥고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호준이 여러 장수와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홀연 보고하기를, 강물 위로 30척의 배가 다가온다고 했다. 호준이 영채를 나가서 바라보니 그 배들이 점점 강둑으로 접근하는데, 배마다 약 백 사람이 탔다. (호준이) 곧 군막으로 돌아와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3천 인에 불과하니 무엇이 두렵겠소!”

 

하고, 다만 부장에게 명하여 계속 탐지하게 하고, 자신은 그대로 술을 마셨다. 정봉이 선단을 1자 형태로 하여 강물 위에 전개하더니 부장들에게 이르기를,

 

대장부가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으려면 바로 오늘이 그 기회요!”

 

하고, 곧 군사들에게 옷과 갑옷과 투구를 벗고, 긴 창이나 큰 극도 쓰지 말고, 오로지 단도를 휴대하라고 명령했다. 위나라 군사가 이것을 보고 크게 웃으며 더욱 대비하지 않았다.

 

忽然連珠炮響了三聲丁奉扯刀當先一躍上岸衆軍皆拔短刀隨奉上岸砍入魏寨魏兵措手不及韓綜急拔帳前大戟迎之早被丁奉搶入懷內手起刀落砍翻在地桓嘉從左邊轉出忙綽槍刺丁奉被奉挾住槍杆嘉棄槍而走奉一刀飛去正中左肩嘉望後便倒奉趕上就以槍刺之三千吳兵在魏寨中左沖右突胡遵急上馬奪路而走魏兵齊奔上浮橋浮橋已斷大半落水而死殺倒在雪地者不知其數車仗馬匹軍器皆被吳兵所獲司馬昭王昶毋丘儉聽知東興兵敗亦勒兵而退

 

갑자기 연주포가 세 차례 울리자 정봉이 칼을 쥐고 앞장서서 강둑 위로 한 번에 펄쩍 뛰어올랐다. 군사들이 모두 단도를 뽑아 들고 정봉을 따라서 강둑에 올라와서 위나라 영채로 돌입했다. 위나라 군사가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데, 한종이 급히 군막 앞의 대극(큰 창)을 들고 맞섰으나, 어느새 정봉이 안으로 들어와서 휘두른 칼에 베여서 땅에 꼬꾸라졌다. 환가가 왼쪽에서 돌아 나와서 바삐 창을 들고 정봉을 찌르려 하지만 정봉이 창 자루를 낚아챘다. 환가가 창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정봉이 던진 칼이 왼쪽 어깨에 명중하여 환가가 뒤로 넘어졌다. 정봉이 뒤쫓아가 창으로 찔렀다. 오나라 군사 3천 명이 위나라 영채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 호준이 급히 말을 타고 길을 뚫어 달아났다. 위나라 군사가 일제히 부교 위로 몰려가지만, 부교는 이미 끊어져서 태반이 물에 빠져 죽었다. 눈 위에 죽어 쓰러진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수레, , 무기 등을 모조리 오나라 군사가 노획했다. 사마소, 왕창, 관구검이 동흥의 패전을 듣고 군사를 끌고 퇴각했다.

 

卻說諸葛恪引兵至東興收兵賞勞了畢乃聚諸將曰司馬昭兵敗北歸正好乘勢進取中原遂一面遣人齎書入蜀求薑維進兵攻其北許以平分天下一面起大兵二十萬來伐中原臨行時忽見一道白氣從地而起遮斷三軍對面不見蔣延曰此氣乃白虹也主喪兵之兆太傅只可回朝不可伐魏恪大怒曰汝安敢出不利之言以慢吾軍心叱武士斬之衆皆告免恪乃貶蔣延爲庶人仍催兵前進

 

한편, 제갈각이 군사를 이끌고 동흥에 이르러, 군사를 거두어 상을 주고 위로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마소가 패전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이 기세를 타고 중원을 취할 좋은 때요.”

 

하고, 곧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가지고 촉나라에 들어가 강유에게 진군하여 북쪽을 공격하라 요청하여, 천하를 나눠 갖자고 하고, 한편으로 20만 대군을 일으켜 중원을 정벌하러 갔다. 출발할 때에, 갑자기 한줄기 하얀 기운이 땅에서 일어나서 삼군(전군, 중군, 후군)을 차단하니 옆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장연이 말하기를,

 

이 기운은 흰 무지개인데 주군이 군사를 잃을 징조입니다. 태부께서 조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위나라 정벌은 불가합니다.”

 

하니, 제갈각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 감히 불리한 말을 내뱉어 우리 군심을 흩뜨리느냐!”

 

하고, 무사들에게 소리 질러 처형하라고 했다. 모두가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 하니, 제갈각이 장연을 서인으로 낮추고, 군사들을 전진하라고 더욱 다그쳤다.

 

丁奉曰魏以新城爲總隘口若先取得此城司馬師破膽矣恪大喜即趲兵直至新城守城牙門將軍張特見吳兵大至閉門堅守恪令兵四面圍定早有流星馬報入洛陽主簿虞松告司馬師曰今諸葛恪困新城且未可與戰吳兵遠來人多糧少糧盡自走矣待其將走然後擊之必得全勝但恐蜀兵犯境不可不防師然其言遂令司馬昭引一軍助郭淮防薑維毋丘儉胡遵拒住吳兵

 

정봉이 말하기를,

 

위나라는 신성을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삼으니 만약 이 성을 먼저 취하면 사마사의 간담이 깨질 것입니다.”

 

하니, 제갈각이 크게 기뻐하며, 군사들을 재촉하여 신성으로 직행했다. 신성을 지키는 아문 장군 장특은 오나라 대군이 오는 것을 보자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갈각이 군사들에게 사면을 포위하라 명령했다. 어느새 유성마(전령 기마)가 낙양으로 달려가 보고했다. 주부 우송이 사마사에게 고하기를,

 

이제 제갈각이 신성을 포위했으나 아직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나라 군사가 멀리서 오니 사람은 많고 양식은 적어 양식이 바닥나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들이 퇴각하기를 기다린 뒤에 공격하면 반드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촉나라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는 것은 방비해야만 합니다.”

 

했다. 사마사가 그 말을 받아들여, 곧 사마소에게 명령하여 1군을 이끌고 곽회를 도와 강유를 막게 하고, 관구검과 호준은 오나라의 군사를 막게 했다.

 

卻說諸葛恪連月攻打新城不下下令衆將並力攻城怠慢者立斬於是諸將奮力攻打城東北角將陷張特在城中定下一計乃令一舌辯之士齎捧冊籍赴吳寨見諸葛恪告曰魏國之法若敵人困城守城將堅守一百日而無救兵至然後出城降敵者家族不坐罪今將軍圍城已九十餘日望乞再容數日某主將盡率軍民出城投降今先具冊籍呈上

 

한편, 제갈각은 여러 달 신성을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하자, 뭇 장수에게 명하기를,

 

힘을 모아 신성을 치되, 태만한 자는 당장 참하겠다.”

 

고 했다. 이에 여러 장수가 힘을 내어 공격하니, 신성의 동북쪽이 곧 함락되려 했다. 장특이 성안에서 꾀를 내어 언변이 뛰어난 사람을 시켜서, 문서들을 가지고 오나라 진영으로 가서 제갈각을 만나서 고하기를,

 

위나라의 법에 따르면, 적인들이 성을 포위했을 때 성을 지키는 장수가 1백 일을 굳게 지키고 아무 구원병이 오지 않아서 성을 나가 적에게 항복하면, 그 가족에게 죄를 연좌하지 않습니다. 이제 장군께서 성을 포위한 지 벌써 9십여 일이니, 바라옵건대 며칠만 사정을 봐주시면 저희 주장께서 군사와 백성을 모두 이끌고 성을 나가 투항하겠습니다. 이제 먼저 이 문서들을 바칩니다.”

 

했다.

 

恪深信之收了軍馬遂不攻城原來張特用緩兵之計哄退吳兵遂拆城中房屋於破城處修補完備乃登城大罵曰吾城中尚有半年之糧豈肯降吳狗耶盡戰無妨恪大怒催兵打城城上亂箭射下恪額上正中一箭翻身落馬諸將救起還寨金瘡舉發衆軍皆無戰心又因天氣亢炎軍士多病恪金瘡稍可欲催兵攻城營吏告曰人人皆病安能戰乎恪大怒曰再說病者斬之衆軍聞知逃者無數

 

제갈각이 이를 깊이 믿어 군마를 거둬들이고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원래, 장특이 완병지계(緩兵之計 적의 공격을 늦추는 계책)로 속여서 오나라 군사를 물러나게 만든 것이었다. 곧 성안의 집을 부수어 성벽의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더니 성 위로 올라가 크게 꾸짖기를,

 

우리 성안에 아직 반년 치 식량이 있거늘 어찌 기꺼이 오나라의 개에게 항복하겠느냐! 끝까지 싸워도 좋다!”

 

했다. 제갈각이 크게 노하여 군사들을 다그쳐 성을 공격했다. 성 위에서 어지러이 화살을 쏘아 제갈각의 얼굴에 한 발이 명중하여 말에서 꼬꾸라져 떨어졌다. 여러 장수가 구원하여 일으켜 영채로 돌아가지만, 화살 상처가 터졌다. 군사들이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게다가 날씨가 몹시 더워서 군사들에게 병이 많았다. 제갈각이 상처가 조금 낫자 군사들을 다그쳐 성을 공격하려 했다. 영채를 관리하는 관리가 고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병이 났는데 어찌 능히 싸우겠습니까?”

 

하니, 제갈각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들의 병을 다시 입에 올리는 이는 처형하겠다!”

 

했다. 군사들이 이를 듣고 도주하는 자가 무수했다.

 

忽報都督蔡林引本部軍投魏去了恪大驚自乘馬遍視各營果見軍士面色黃腫各帶病容遂勒兵還吳早有細作報知毋丘儉儉盡起大兵隨後掩殺吳兵大敗而歸恪甚羞慚托病不朝吳主孫亮自幸其宅問安文武官僚皆來拜見恪恐人議論先搜求衆官將過失輕則發遣邊方重則斬首示衆於是內外官僚無不悚懼又令心腹將張約朱恩管禦林軍以爲牙爪

 

갑자기 보고하기를, 도독 채림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했다고 했다. 제갈각이 크게 놀라 직접 말을 타고 각 영채를 둘러보니, 과연 군사들의 얼굴색이 누렇게 떠 있고 사람마다 병든 얼굴이었다.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오나라로 돌아갔다. 재빨리 세작이 관구검에게 알리니, 관구검이 대군을 모두 일으켜서 뒤를 습격하여, 오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제갈각이 몹시 부끄러워서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오나라 군주 손량이 직접 그 집으로 거둥하여 문안하니, 문무 관료가 모두 와서 알현했다. 제갈각은 사람들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먼저 여러 관리의 과실을 캐내어 과실이 가벼우면 변방으로 유배하고, 무거우면 참수하여 뭇 사람에게 보였다. 이에 내외 관료들이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심복 장수 장약과 주은을 시켜 어림군을 통제하도록 하여, 수하로 삼았다.

 

卻說孫峻字子遠乃孫堅弟孫靜曾孫孫恭之子也孫權存日甚愛之命掌禦林軍馬今聞諸葛恪令張約朱恩二人掌禦林軍奪其權心中大怒太常卿滕胤素與諸葛恪有隙乃乘間說峻曰諸葛恪專權恣虐殺害公卿將有不臣之心公系宗室何不早圖之峻曰我有是心久矣今當即奏天子請旨誅之於是孫峻滕胤入見吳主孫亮密奏其事亮曰朕見此人亦甚恐怖常欲除之未得其便今卿等果有忠義可密圖之胤曰陛下可設席召恪暗伏武士於壁衣中擲杯爲號就席間殺之以絕後患亮從之

 

한편, 손준은 자가 자원인데, 바로 손견의 아우 손정의 증손자 손공의 아들이었다. 손권이 생전에 그를 몹시 아껴서 어림군의 군마를 장악하게 했었다. 이제 들으니 제갈각이 장약과 주은에게 어림군을 장악하게 하여 그의 권한을 빼앗으니, 마음속으로 크게 노했다. 태상경 등윤이 평소에 제갈각과 사이가 벌어져 있었는데 그 틈을 타서 손준에게 말하기를,

 

제갈각이 권력을 전횡하여 방자하고 모질어 공경들을 살해하니 장차 신하답지 못한 마음을 품을 것이오. 공께서 종실에 속하셨는데 어찌 조속히 그를 도모하지 않으시오?”

 

하니, 손준이 말하기를,

 

내가 그런 마음을 품은 지 오래요. 이제 당장 천자께 상주하여 교지를 내려 그를 주살하라 하겠소.”

 

했다. 이에 손준과 등윤이 오나라 군주 손량을 만나러 들어가서, 몰래 그 일을 아뢰었다. 손량이 말하기를,

 

짐이 그 사람을 볼 때도 몹시 공포스럽소. 늘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있으나 아직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소. 이제 경들이 참으로 충의를 지녔으니 은밀히 그를 도모하시오.”

 

하니, 등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자리를 마련하여 제갈각을 부르고, 몰래 무사들을 장막 뒤에 두십시오.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그 자리에서 죽여서 후환을 근절하소서.”

 

하니, 손량이 그 말에 따랐다.

 

卻說諸葛恪自兵敗回朝托病居家心神恍惚一日偶出中堂忽見一人穿麻掛孝而入恪叱問之其人大驚無措恪令拿下拷問其人告曰某因新喪父親入城請僧追薦初見是寺院而入卻不想是太傅之府卻怎生來到此處也恪大怒召守門軍士問之軍士告曰某等數十人皆荷戈把門未嘗暫離並不見一人入來恪大怒盡數斬之是夜恪睡臥不安忽聽得正堂中聲響如霹靂恪自出視之見中梁折爲兩段恪驚歸寢室忽然一陣陰風起處見所殺披麻人與守門軍士數十人各提頭索命恪驚倒在地良久方蘇次早洗面聞水甚血臭恪叱侍婢連換數十盆皆臭無異

 

한편, 제갈각은 패전하여 조정에 돌아온 뒤에, 병을 핑계로 집안에 머무는데, 심신이 멍했다. 어느 날, 마침 마루를 나서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상복을 입고 들어왔다. 제갈각이 그에게 꾸짖어 물으니, 그가 크게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제갈각이 그를 붙잡아 고문하니 그가 고하기를,

 

저는 이제 막 부친상을 당하여 성으로 들어가 중을 불러 명복을 빌려 하였습니다. 처음에 이곳이 절인 줄 알고 들어온 것이지, 태부의 부중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제갈각이 크게 노하여 문을 지키는 군사를 불러 물으니 그 군사가 고하기를,

 

저희 수십 인이 모두 창을 들고 문을 지키는데 잠시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지만 한 사람도 들어오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했다. 제갈각이 크게 노하여 모조리 처형했다. 이날 밤 제갈각이 잠자리에 누워도 불안한데, 갑자기 본채 안에서 벼락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제갈각이 직접 나가서 보니, 대들보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제갈각이 놀라서 침실로 돌아오니, 갑자기 한바탕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그가 죽인 상복 입은 사람과 성문 수비 군사들 수십 인이 머리를 손에 들고 목숨을 살려내라고 했다. 제갈각이 놀라서 바닥에 쓰러졌다가 한참 지나서야 깨어났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물에서 피비린내가 몹시 났다. 제갈각이 몸종을 꾸짖어서 연거푸 대야를 수십 차례 바꾸지만 모두 다름없이 냄새가 났다.

 

恪正驚疑間忽報天子有使至宣太傅赴宴恪令安排車仗方欲出府有黃犬銜住衣服嚶嚶作聲如哭之狀恪怒曰犬戲我也叱左右逐去之遂乘車出府行不數步見車前一道白虹自地而起如白練沖天而去恪甚驚怪心腹將張約進車前密告曰今日宮中設宴未知好歹主公不可輕入恪聽罷便令回車行不到十餘步孫峻滕胤乘馬至車前曰太傅何故便回恪曰吾忽然腹痛不可見天子胤曰朝廷爲太傅軍回不曾面敘故特設宴相召兼議大事太傅雖感貴恙還當勉強一行恪從其言遂同孫峻滕胤入宮張約亦隨入

 

제갈각이 놀라고 의심하는 사이에, 갑자기 천자의 사자가 와서 태부를 연회에 부른다고 했다. 제갈각이 수레를 준비하라 명하여 부중을 나가려 하는데, 누런 개 한 마리가 옷을 물고 훌쩍훌쩍 소리를 내니 마치 곡하는 듯했다. 제갈각이 노하여 말하기를,

 

개가 나를 놀리는구나!”

 

하고, 좌우의 사람들을 꾸짖어 개를 내쫓았다. 마침내 수레를 타고 부중을 나섰다. 그런데 몇 걸음 못 가서 수레 앞에 한줄기 하얀 무지개가 땅에서 솟아 나와 마치 하얀 비단이 하늘을 찌르는 듯이 날아갔다. 제갈각이 몹시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심복 장수 장약이 수레 앞으로 나와서 은밀히 고하기를,

 

오늘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주공께서 함부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하니, 제갈각이 이 말을 듣고 수레를 돌리라고 명했다. 열 걸음 남짓을 못 가서 손준과 등윤이 말을 타고 수레 앞으로 와서 말하기를,

 

태부께서 무슨 까닭으로 돌아가시오?”

 

했다. 제갈각이 말하기를,

 

갑자가 복통이 생겨서 천자를 알현할 수 없겠소.”

 

하니, 등윤이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태부께서 전장에서 돌아온 뒤에 여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특별히 연회를 열어 초대하고 아울러 대사를 의논하러 한 것이오. 태부께서 좀 불편하시더라도 참고 함께 갑시다.”

 

했다. 제갈각이 그 말을 따라 마침내 손준, 등윤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고 장약도 따라 들어갔다.

 

恪見吳主孫亮施禮畢就席而坐亮命進酒恪心疑辭曰病軀不勝杯酌孫峻曰太傅府中常服藥酒可取飲乎恪曰可也遂令從人回府取自制藥酒到恪方才放心飲之酒至數巡吳主孫亮托事先起孫峻下殿脫了長服著短衣內披環甲手提利刃上殿大呼曰天子有詔誅逆賊諸葛恪大驚擲杯於地欲拔劍迎之頭已落地張約見峻斬恪揮刀來迎峻急閃過刀尖傷其左指峻轉身一刀砍中張約右臂武士一齊擁出砍倒張約剁爲肉泥孫峻一面令武士收恪家眷一面令人將張約並諸葛恪屍首用蘆席包裹以小車載出棄於城南門外石子崗亂塚坑內

 

제갈각이 오나라 군주 손량을 만나 인사를 마치고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손량이 술을 권하자 제갈각이 의심하여 사양하며 말하기를,

 

병든 몸이라 술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니, 손준이 말하기를,

 

태부의 부중에서 날마다 복용하는 약주를 가져다가 마시면 되지 않겠소?”

 

했다. 제갈각이 말하기를,

 

그러면 되겠소.”

 

하니, 곧 종을 부중으로 돌려보내어 직접 담근 약주를 가져오니 제갈각이 비로소 마음 놓고 마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오나라 군주 손량은 일을 핑계로 먼저 일어났다. 손준은 전각을 내려가서 긴 옷을 벗고 짧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 안에 갑옷을 두르고 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전각을 올라가 크게 외치기를,

 

천자께서 역적을 주살하라 조서를 내리셨다!”

 

했다. 제갈각이 크게 놀라 술잔을 바닥에 던지고 검을 뽑아 맞서려 했지만 머리가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장약은 손준이 제갈각을 참하는 것을 보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손준이 번뜻 칼끝을 피하지만 왼쪽 손가락을 다쳤다. 손준이 몸을 돌려 한칼에 장약의 오른쪽 어깨를 베었다. 무사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장약을 베어 넘어뜨려서 조각내어 난도질했다. 손준이 무사들을 시켜 제갈각의 가족을 잡아들이는 한편, 사람들을 시켜 장약과 제갈각의 시신을 돗자리에 둘둘 말아서 작은 수레에 싣고 나가 남문 밖 석자강(石子崗)의 어느 버려진 무덤 구덩이 속에 버리게 했다.

 

卻說諸葛恪之妻正在房中心神恍惚動止不寧忽一婢女入房恪妻問曰汝遍身如何血臭其婢忽然反目切齒飛身跳躍頭撞屋梁口中大叫吾乃諸葛恪也被奸賊孫峻謀殺恪合家老幼驚惶號哭不一時軍馬至圍住府第將恪全家老幼俱縛至市曹斬首時吳建興二年冬十月也

 

한편, 제갈각의 처가 방 안에 있는데 심신이 멍하고 거동이 편치 못했다. 갑자기 여종 하나가 방으로 들어오니 제갈각의 처가 묻기를,

 

네 온몸에서 어째서 피비린내가 나느냐?”

 

하니, 그 여종이 돌연 노려보고 이를 갈며 몸을 날려 뛰어올라 머리를 기둥에 부딪혀 큰 소리를 질러,

 

내가 바로 제갈각이오! 간사한 역적 손준에게 모살 당했소!”

 

했다. 제갈각의 온 집안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며 목놓아 울었다. 잠시 뒤 군마가 몰려와 저택을 포위하고, 온 집안의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모두 포박하여 저잣거리로 끌고 가서 참수했다. 이때가 오나라 건흥 2년 겨울 시월이었다.

 

昔諸葛瑾存日見恪聰明盡顯於外歎曰此子非保家之主也又魏光祿大夫張緝曾對司馬師曰諸葛恪不久死矣師問其故緝曰威震其主何能久乎至此果中其言卻說孫峻殺了諸葛恪吳主孫亮封峻爲丞相大將軍富春侯總督中外諸軍事自此權柄盡歸孫峻矣且說薑維在成都接得諸葛恪書欲求相助伐魏遂入朝奏准後主複起大兵北伐中原正是一度興師未奏績兩番討賊欲成功

 

지난날 제갈근은 생전에 제갈각이 총명하고 남들보다 몹시 뛰어나자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집안을 보전할 인물은 못 되겠구나!”

 

했다. 또한 위나라 광록대부 장집이 일찍이 사마사를 만나 말하기를,

 

제갈각은 머지않아 죽게 될 것입니다!”

 

했다. 사마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장집이 말하기를,

 

위세가 그 주공을 뒤흔드는데 어찌 오래 가겠습니까?”

 

했다. 한편, 손준이 제갈각을 죽이자 오나라 군주 손량이 손준을 승상 대장군 부춘후로 봉하여 내외의 군사들을 총지휘하게 했다. 이로부터 권력이 모두 손준에게 돌아갔다. 한편, 강유는 성도에서 제갈각의 서신을 접하자, 오나라를 도와서 위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곧 조정으로 들어가 후주에게 아뢰어 다시 대군을 일으켜 북쪽으로 중원을 정벌하려고 했다. 이야말로, 첫째 번에 출병하여 공적을 세우지 못했으니, 둘째 번에 역적을 토벌하여 공을 이루려 하네.

 

未知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승부가 어찌될 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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