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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교토삼굴(狡兎三窟)

진현서당 주간지

by 진현서당 2024. 10. 1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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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

 

: 교활할 교

: 토끼 토

: 석 삼

: 구멍 굴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은 전문(田文)으로, ()나라의 귀족이다. 그는 신릉군(信陵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 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 불렸다. 사공자(四公子)는 재능 있는 현사(賢士)들을 좋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재워주고 먹여주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식객(食客)’이라고 했다. 그들은 각기 수천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 가장 많았다.

 

()나라에 풍환(馮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매우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맹상군(孟嘗君)에게 사람을 보내어 식객(食客)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청했다. 맹상군(孟嘗君)은 두말없이 그를 받아들였지만, 다른 식객(食客)들은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라고 얕보며 잡곡밥에 푸성귀만 주면서 음식 대접을 소홀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환(馮驩)은 대청 기둥에 기대어 앉아 검()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장검(長劍), 장검(長劍), 이제는 돌아가자. 물고기도 먹을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것을 본 맹상군(孟嘗君)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도 물고기를 대접하게. 다른 식객(食客)들처럼 잘 대접해 주게.”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풍환(馮驩)은 또 기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장검(長劍), 장검(長劍), 돌아가자. 밖에 나가는데 수레가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말을 들은 맹상군(孟嘗君)은 아랫사람들에게 말했다. “풍환(馮驩)도 다른 식객(食客)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게. 그가 밖으로 나갈 때 수레를 내주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풍환(馮驩)은 또 노래를 불렀다. “장검(長劍), 장검(長劍), 돌아가자. 여기서는 노인을 봉양(奉養)할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노래를 들은 맹상군(孟嘗君)은 아랫사람들에게 분부해 그의 어머니에게 매일 세 끼의 음식을 보내게 했다. 그 다음부터는 풍환(馮驩)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맹상군(孟嘗君)은 풍환(馮驩)에게 설읍(薛邑)에 가서 빚을 받아오라고 했다. 떠날 때 풍환(馮驩)이 물었다. “빚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올까요?”

우리 집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보고, 부족한 것을 사오게.”

 

교토삼굴(狡免三窟)

 

설읍(薛邑)에 도착한 풍환(馮驩)은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채무를 하나하나 대조해 보게 했다. 그러고는 맹상군(孟嘗君)이 빚을 탕감(蕩減)해 주기로 했다며 선포하고는, 빚 문서들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태워버렸다. 백성들이 맹상군(孟嘗君)에게 감사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튿날 풍환(馮驩)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맹상군(孟嘗君)은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빚은 다 받아왔는가?”

, 다 받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사왔는가?”

분부대로 공자님의 댁에 없는 것을 사왔습니다. 소인이 보건대 공자님의 댁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오직 ()’가 부족한 것 같아서 ()’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맹상군(孟嘗君)이 어리둥절해하자 풍환이 말을 보탰다. “소인은 공자님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공자님의 결정이라고 꾸며,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빚 문서도 전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같이 공자님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소인은 공자님에게 ()’를 사왔습니다.”

 

맹상군(孟嘗君)은 속으로는 몹시 언짢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에 제()나라 민왕(泯王)이 맹상군(孟嘗君)의 직위를 파면시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봉읍지(封邑地)인 설읍(薛邑)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설읍(薛邑)의 백성들은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1백 리 밖까지 나와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광경을 본 맹상군(孟嘗君)은 크게 감동했으며 풍환(馮驩)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가 사왔다는 ()’를 이 눈으로 보게 되었네.”

 

그러자 풍환(馮驩)은 이렇게 대답했다. 꾀 있는 토끼들은 굴을 세 개씩 파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설읍(薛邑)은 굴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굴 하나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소인이 굴 두 개를 더 파놓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맹상군(孟嘗君)은 찬성했다. 풍환(馮驩)은 양()나라로 가서 혜왕(慧王)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나라 대신 맹상군(孟嘗君)은 임금에게 쫓겨나 국외에 있습니다. 맹상군(孟嘗君)은 재능 있고 덕이 높은 분입니다. 그를 등용하는 나라는 반드시 강성해질 것입니다.”

 

혜왕(惠王)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맹상군(孟嘗君)을 재상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신더러 수레 1백 대와 황금 1천 근을 갖고 설읍(薛邑)으로 가서 맹상군(孟嘗君)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나라 민왕(泯王)은 무척 놀랐으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는 즉시 태자의 스승에게 황금 1천 근과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 자신의 보검, 잘못을 사과하는 문서를 가지고 설읍으로 가서 맹상군(孟嘗君)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맹상군(孟嘗君)의 진가를 알아차린 민왕(泯王)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 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馮驩)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제민왕(齊泯王)을 설득, () 땅에 제()나라 선대(先代)의 종묘(宗廟)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先王)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祭器)를 종묘(宗廟)에 바치도록 했다. 선대(先代)의 종묘(宗廟)가 맹상군(孟嘗君)의 영지(領地)에 있는 한 설혹 제왕(齊王)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孟嘗君)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高枕安眠)하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孟嘗君)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을 위해 세 가지 보금자리를 마련한 덕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풍환(馮驩)戰國策》〈제책편(齊策篇)에서는 풍훤(馮諼)’으로 적고 있다. 이 고사는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완벽한 준비 뒤에는 뜻하지 않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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