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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매천의 묘소에서[梅泉墓 매천묘]

오늘 漢詩 한 수/11월의 漢詩

by 진현서당 2024. 11. 2.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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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地茫茫劫正蘭,
西臺月落暮江寒.
秖今筆下愁無土,
但畵春風莫畵蘭.



대지에는 까마득히 호겁(浩劫)의 재난 한창이고,
서대(西臺)에는 달도 지고 저문 강엔 날이 차다.
지금 붓을 잡은들 땅이 없어 시름하노니,
봄바람이나 그리고 난초는 그리지 말자.


대지망망겁정란, 서대월락모강한.
지금필하수무토, 단화춘풍막화란.

이건방(李建芳·1861~1939)

 

대지(大地)는 흐릿하고 먼 곳에서 재난(浩劫)이 한창이다. 가끔 뉴스에서나 보는 장면처럼, 서대(西臺)에선 달도 슬픈 얼굴로 지고, 저문 강은 한없이 차가워 보인다. 이런 시국에 고작 시 한 수 쓴다고 대지가 흔들리겠나? 요즘 누가 내 글을 읽겠냐고! 문천상(文天祥) 선생이 자결한 그날의 기운이 무겁게 느껴지니, 대체 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깊어만 간다.

 

고작 글을 쓰는 노릇이니, 한 수의 시를 위해 고민하는 건 좀 우스운 일 아닌가? 글쟁이(筆者)인 나의 곤란함이 드러난다. 이럴 땐 이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고, 그냥 주저앉아 난초(蘭草) 한 뿌리 그리며 우울해지면 그만이지. 하지만 땅이 없는 망국(亡國)의 슬픔이 내 맘을 누르니, 고결한 난초를 그리기엔 이 무거운 마음이 너무나도 버겁다.

 

그래서 오늘은 봄바람(春風)이나 그려볼까? 그나마 제법 가벼운 주제 아닌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것이 내게 기분 전환이 될지도 모르겠다. “난초를 그리지 말라는 생각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상상 속의 봄바람을 묘사하며, 하늘을 날아다닐까? 물론 땅은 잃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자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이 봄바람이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강물은 차가운데, 하늘은 검고, 무엇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대에서 그 신비한 바람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닐까? 봄바람은 언제나 느긋한 성격이라, 그리워도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차가운 대지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는 그냥 유머(幽默)를 띠며 생각해본다.

 

, 땅이 없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혼자만의 상념에 웃음을 터뜨린다. 고결한 선비(志士)의 무덤 앞에서 묵상하는 나는 그야말로 부끄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난초를 그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아닌, 겨우 봄바람을 기다리는 신세라니,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희망(希望)이 존재할 것이고, 적어도 다시 땅을 밟고 시를 쓸 날을 기약하며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나는 봄바람은 다가올 내일(明日)에 대한 희망을 함께 담아 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봐, 고난은 잠시고, 결국엔 대지에서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거야!” 이렇게 기운이 나는 말이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나를 위로해주는 그 바람의 소리에 적당히 맞춰 웃으며 즐거운 상상을 하기로 했다.

 

그러니 난 재난(災難)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며, 다시 난초를 그릴 날을 기다리자. 아름다운 봄(美麗春天)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난 초라한 오두막의 한쪽에서 한 수의 시를 지으며, 한참 동안 이어질 이 상념을 음미할 것이다.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매천의 묘소에서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다음에 있을 희망의 새싹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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