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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유황숙이 북해에서 공융을 구하고 온후 여포가 복양에서 조조를 깨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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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回

劉皇叔北海救孔融 呂溫侯濮陽破曹操

 

11

유황숙이 북해에서 공융을 구하고 온후 여포가 복양에서 조조를 깨뜨리다.

 

卻說獻計之人乃東海朐縣人姓糜名竺字子仲此人家世富豪嘗往洛陽買賣乘車而回路遇一美婦人來求同載竺乃下車步行讓車與婦人坐婦人請竺同載竺上車端坐目不邪視行及數裏婦人辭去臨別對竺曰我乃南方火德星君也奉上帝敕往燒汝家感君相待以禮故明告君君可速歸搬出財物吾當夜來言訖不見竺大驚飛奔到家將家中所有疾忙搬出

 

각설, 계책을 바친 사람은 동해군 구현 출신으로 성은 미이고 이름은 축이며 자는 자중이다. 이 사람은 집안이 대대로 부호인데, 일찍이 낙양에 가서 장사하고 수레를 타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서 태운 뒤에 자신은 수레에서 내려 걷고 부인에게 수레를 양보하여 태웠다. 부인이 동승하기를 청하여 미축이 타고서도 단정히 앉았을 뿐 눈으로 훔쳐보지 않았다. 몇 리를 가서 부인이 인사하고 가며 헤어질 때 미축에게 말하기를,

 

나는 남쪽의 화덕성군(불을 관장하는 신)이오. 상제(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그대 집을 불태우러 왔으나 그대가 예의로써 대해주어 감동했기 때문에 알려주겠소. 그대는 속히 돌아가서 재물을 반출하시오. 내가 오늘밤에 찾아가리다.”

 

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미축이 크게 놀라 집으로 바삐 달려가서 집안의 소유물을 황급히 들어내어 옮겼다.

 

是晚果然廚中火起盡燒其屋竺因此廣舍家財濟貧拔苦後陶謙聘爲別駕從事當日獻計曰某願親往北海郡求孔融起兵救援更得一人往青州田楷處求救若二處軍馬齊來操必退兵矣謙從之遂寫書二封問帳下誰人敢去青州求救一人應聲願往衆視之乃廣陵人姓陳名登字元龍陶謙先打發陳元龍往青州去訖然後命糜竺齎書赴北海自己率衆守城以備攻擊

 

그날 밤 과연 부엌에서 불이 나서 그 집안을 모두 태웠다. 미축이 이로부터 널리 집안 재산을 베풀어 가난한 이를 구제하여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 뒤) 도겸이 초빙하여 별가종사(지방 수령의 보좌관)로 삼았다. 그날 (미축이) 계책을 바쳐 말하기를,

 

제가 북해군으로 직접 가서 공융에게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도록 요청하겠습니다. 또 한 사람에게 청주의 전해에게 가서 구원병을 구하십시오. 만약 두 곳에서 군마가 일제히 오면 조조는 반드시 병사를 물릴 것입니다.”

 

하였다. 도겸이 그 계책에 따라 편지 두 통을 쓴 뒤 휘하 가운데 누가 감히 청주로 가겠느냐 물으니, 한 사람이 말이 끝나자 바로 가겠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보니, 광릉 출신으로 성은 진이고 이름은 등이며 자는 원룡이다. 도겸이 먼저 진원룡에게 청주로 가게 한 후에, 미축에게도 편지를 주어 북해로 가라고 명했다. (도겸)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성을 지키며 공격에 대비했다.

 

卻說北海孔融字文舉魯國曲阜人也孔子二十世孫泰山都尉孔宙之子自小聰明年十歲時往謁河南尹李膺閽人難之融曰我系李相通家及入見膺問曰汝祖與吾祖何親融曰昔孔子曾問禮於老子融與君豈非累世通家膺大奇之少頃太中大夫陳煒至膺指融曰此奇童也煒曰小時聰明大時未必聰明融即應聲曰如君所言幼時必聰明者煒等皆笑曰此子長成必當代之偉器也自此得名後爲中郎將累遷北海太守極好賓客常曰座上客常滿樽中酒不空吾之願也在北海六年甚得民心

 

한편, 북해태수 공융은 자가 문거로 노국 곡부 사람이고 공자의 이십세 손이며 태산도위 공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열다섯 살에 하남윤 이응을 찾아가 뵈었는데 문지기가 가로막으니 공융이 말하기를,

 

나는 이 씨 집안과 맺어져 서로 통하는 사이요.”

 

하였다. 들어가서 만나게 되자 이응이 묻기를,

 

너의 조상과 내 조상이 어찌 친하느냐?”

 

하니, 공융이 말하기를,

 

예전에 공자께서 일찍이 노자(李耳)께 예를 물으셨으니 저와 공이 어찌 대대로 집안끼리 통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응이 크게 기특하다 여겼다. 잠시 뒤 태중대부 진위가 이르렀는데, 이응이 공융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오.”

 

하였다. 진위가 말하기를,

 

어려서 총명하다고 커서 반드시 총명하지는 않지요.”

 

하니, 공융이 그 말을 듣자마자 말하기를,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려서 분명히 총명하셨겠습니다.”

 

하였다. 진위 등이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성하면 반드시 당대의 큰 그릇이 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을 얻어서 뒤에 중랑장이 되고 여러번 옮겨 북해태수가 되었다. 그는 빈객을 아주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자리에 손님이 가득하고 술통에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오.”

 

하였다. 북해태수로 육 년 있으면서 민심을 크게 얻었다.

 

當日正與客坐人報徐州糜竺至融請入見問其來意竺出陶謙書曹操攻圍甚急望明公垂救融曰吾與陶恭祖交厚子仲又親到此如何不去只是曹孟德與我無仇當先遣人送書解和如其不從然後起兵竺曰曹操倚仗兵威決不肯和融教一面點兵一面差人送書正商議間忽報黃巾賊黨管亥部領群寇數萬殺奔前來

 

그날 마침 손님과 앉아 있는데 서주의 미축이 찾아왔다고 한다. 공융이 불러들여 그 찾아온 뜻을 물으니 미축이 도겸의 서찰을 꺼내며 말하기를,

 

조조가 포위공격하여 몹시 위급하니 명공께서 구원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나와 도공조(도겸)는 교분이 두텁고 자중(미축)도 몸소 여기까지 왔으니 어찌 (도우러) 가지 않겠소. 다만 조맹덕(조조)과 나는 원수진 일이 없으니 마땅히 먼저 사람을 보내 편지로 화해시켜 보겠소. 만약 따르지 않으면 그때에 기병하겠소.”

 

하였다. 미축이 말하기를,

 

조조는 군사가 많은 위세만 믿고서 결코 화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공융이 한편으로 병력을 점검하면서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 글을 전했다. 이렇게 미축과 상의하고 있는 사이에 황건적 잔당 관해가 떼도적 수만 명을 거느리고 몰려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孔融大驚急點本部人馬出城與賊迎戰管亥出馬曰吾知北海糧廣可借一萬石即便退兵不然打破城池老幼不留孔融叱曰吾乃大漢之臣守大漢之地豈有糧米與賊耶管亥大怒拍馬舞刀直取孔融融將宗寶挺槍出馬戰不數合被管亥一刀砍宗寶於馬下孔融兵大亂奔入城中管亥分兵四面圍城孔融心中鬱悶糜竺懷愁更不可言

 

공융이 크게 놀라 급히 휘하 인마를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 도적을 맞아 싸웠다. 관해가 말을 타고 나와 말하기를,

 

내가 알기로, 북해에 양식이 많다 하니 1만 석만 빌려주면 즉시 군사를 물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성을 깨트려서 늙은이와 아이도 남겨놓지 않겠다

 

하니, 공융이 꾸짖기를,

 

내가 한나라의 신하로서 한나라의 땅을 지키는데 어찌 양식을 도적에게 주겠는가!”

 

하였다. 관해가 대노하여 말을 박차 칼춤을 추며 곧장 공융에게 달겨드니, 공융의 장수 종보가 창을 꼬나잡고 말을 타고 나갔지만 싸운지 몇 합이 안 되어 관해의 한 칼에 베여서 말 아래 떨어진다. 공융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성중으로 달려 들어왔다. 관해가 병력을 나누어 성을 사면을 포위하니 공융의 가슴이 답답하고 미축도 수심에 잠겨 다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次日孔融登城遙望賊勢浩大倍添憂惱忽見城外一人挺槍躍馬殺入賊陣左沖右突如入無人之境直到城下大叫開門孔融不識其人不敢開門賊衆趕到壕邊那人回身連搠十數人下馬賊衆倒退融急命開門引入其人下馬棄槍徑到城上拜見孔融融問其姓名對曰某東萊黃縣人也覆姓太史名慈字子義老母重蒙恩顧某昨自遼東回家省親知賊寇城老母說屢受府君深恩汝當往救某故單馬而來孔融大喜原來孔融與太史慈雖未識面卻曉得他是個英雄因他遠出有老母住在離城二十裏之外融常使人遺以粟帛母感融德故特使慈來救

 

이튿날 공융이 성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도적의 세력이 매우 크므로 더욱 근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밖에서 한 사람이 창을 잡고 말을 몰아 적진으로 쳐들어가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좌충우돌(左衝右突)하더니 성 아래에 와서,

 

문을 여시오.”

 

라고 크게 외치는 것을 보았다. 공융은 그 사람이 누군인지 몰라 감히 문을 열지 못했다. 적의 무리가 해자 근처까지 추격하자 그 사람이 다시 몸을 돌려 연달아 십수 인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니 적의 무리가 뒤로 물러났다. 공융이 급히 명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그 사람이 말에서 내려 창을 버리고 성위로 올라와 공융에게 절하고 뵈었다. 공융이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동래군 황현 출신으로 복성(두 글자 성씨)이 태사이고 이름은 자이며 자는 자의입니다. 노모께서 은혜를 크게 입었는데, 제가 어제 요동에서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뵙고, 도적이 성을 공격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모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또의 깊은 은혜를 여러 번 받았으니 네가 마땅히 가서 도와드려라하시므로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공융이 크게 기뻐하였다. 본래 공융과 태사자는 비록 면식이 없었지만 (공융은) 그가 영웅인 걸 바로 알았다. 그가 멀리 나가 있을 때 노모가 성 밖 20리에 살고 있어 공융이 항상 사람을 시켜 곡식과 비단을 보내주었으므로 노모가 공융의 덕에 감동하여 태사자를 보내어서 구원한 것이었다.

 

當下孔融重待太史慈贈與衣甲鞍馬慈曰某願借精兵一千出城殺賊融曰君雖英勇然賊勢甚盛不可輕出慈曰老母感君厚德特遣慈來如不能解圍慈亦無顏見母矣願決一死戰融曰吾聞劉玄德乃當世英雄若請得他來相救此圍自解只無人可使耳慈曰府君修書某當急往融喜修書付慈慈擐甲上馬腰帶弓矢手持鐵槍飽食嚴裝城門開處一騎飛出近壕賊將率衆來戰慈連搠死數人透圍而出管亥知有人出城料必是請救兵的便自引數百騎趕來八面圍定慈倚住槍拈弓搭箭八面射之無不應弦落馬賊衆不敢來追

 

즉시 공융이 태사자를 후대하며 의복과 갑옷과 안장과 말을 주니, 태사자 말하기를,

 

제게 정예병 천 명을 주시면 성을 나가서 도적을 무찌르겠습니다.”

 

하였다. 공융이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빼어나게 용맹하나 적세가 아주 성하니 가볍게 나가서는 안 될 것이오.”

 

하니, 태사자가 말하기를,

 

노모께서 사또의 두터운 은덕에 감격하여 특별히 저를 보냈습니다. 만약 포위를 풀지 못한다면 저도 노모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한바탕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하였다. 공융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유현덕이 당세의 영웅이라는데, 만약 그에게 구원을 청하여 온다면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이오. 다만 보낼 사람이 없구려.”

 

하니,

 

사또께서 글을 써 주시면 제가 마땅히 급히 가겠습니다.”

 

하였다. 공융이 기뻐하며 글을 써서 태사자에게 주니, 태사자가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허리에 활과 화살을 차고 손에는 쇠 창을 쥐고 배불리 먹은 후에 단단히 준비하여 성문을 열고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달려나갔다. 해자 근처에서 적장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싸웠지만 태사자가 연달아 몇 명을 찔러 죽이고 포위를 뚫고 나갔다. 관해가 누군가 성을 나온 것을 알고 필시 구원병을 요청하러 가는 것이라 여기고 스스로 수백 기를 이끌고 추격하여 여덟 방면으로 포위했다. 태사자가 창을 비껴놓고 활을 들고 화살을 매겨 여덟 방면으로 쏘아대니 시윗소리 떨어질 때마다 낙마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도적들이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太史慈得脫星夜投平原來見劉玄德施禮罷具言孔北海被圍求救之事呈上書劄玄德看畢問慈曰足下何人慈曰某太史慈東海之鄙人也與孔融親非骨肉比非鄉黨特以氣誼相投有分憂共患之意今管亥暴亂北海被圍孤窮無告危在旦夕聞君仁義素著能救人危急故特令某冒鋒突圍前來求救玄德斂容答曰孔北海知世間有劉備耶乃同雲長翼德點精兵三千往北海郡進發

 

태사자가 탈출하여 그날 밤 평원으로 가서 유현덕을 만났다. 인사를 마치고 북해태수 공융이 포위되어 구원을 청하는 사정을 갖추어 말하고 서찰을 드렸다. 현덕이 읽어보고 난 후, 태사자에게 묻기를,

 

그대는 누구시오?”

 

하니, 태사자가 말하기를,

 

저는 태사자로 동해의 촌사람입니다. 공융과 가까워도 골육은 아니고 친해도 동향인도 아니지만 특별히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우환을 함께 나눌 뜻을 가졌습니다. 이제 관해가 난폭하여 북해가 포위되고 아무데도 도움을 청할 곳 없이 고립되니 위급하기가 아침저녁에 처했습니다. 듣자하니 공께서 평소 인자하고 정의감이 높아서 능히 사람들의 위급을 구해주실 것이라 하므로 특별히 저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고 달려와 구원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현덕이 모습을 가다듬고 대답하기를,

 

공북해(북해태수 공융)께서 세간에 유비가 있는 줄 아시오?”

 

하였다. 이에 운장과 익덕과 더불어 정예병 3천을 징집히여 북해군으로 진군했다.

 

管亥望見救軍來到親自引兵迎敵因見玄德兵少不以爲意玄德與關太史慈立馬陣前管亥忿怒直出太史慈卻待向前雲長早出直取管亥兩馬相交衆軍大喊量管亥怎敵得雲長數十合之間青龍刀起劈管亥於馬下太史慈張飛兩騎齊出雙槍並舉殺入賊陣玄德驅兵掩殺城上孔融望見太史慈與關張趕殺賊衆如虎入羊群縱橫莫當便驅兵出城兩下夾攻大敗群賊降者無數餘黨潰散

 

관해가 멀리 구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친히 병력을 이끌고 적을 맞았다. 그는 현덕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현덕이 관우 장비 태사자와 함께 진 앞에 말을 세우니 관해가 성을 내어 달려 나왔다. 태사자는 앞을 향해 기다리고 운장이 먼저 나가 곧바로 관해와 맞붙었다. 두 말이 엇갈리자 군사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관해가 어찌 운장을 대적하겠는가, 수십 합 사이에 청룡도를 들어 관해를 쪼개어 말 아래 떨어뜨렸다. 태사자와 장비 두 사람이 일제히 출격하여 쌍창을 나란히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고, 현덕이 병사를 몰아 덮쳤다. 성 위에서 공융이 멀리 태사자와 관우 장비가 도적들을 무찌르는 것이 마치 호랑이가 양떼 속에 들어가 종횡으로 무찌르는 것 같음을 보고 병사를 몰아 성에서 나왔다. 양쪽에서 협공하여 도적떼를 크게 패퇴시키니 항복하는 자가 무수하고 나머지는 무너져 흩어졌다.

 

孔融迎接玄德入城敘禮畢大設筵宴慶賀又引糜竺來見玄德具言張闓殺曹嵩之事今曹操縱兵大掠圍住徐州特來求救玄德曰陶恭祖乃仁人君子不意受此無辜之冤孔融曰公乃漢室宗親今曹操殘害百姓倚強欺弱何不與融同往救之玄德曰備非敢推辭奈兵微將寡恐難輕動孔融曰融之欲救陶恭祖雖因舊誼亦爲大義公豈獨無仗義之心耶玄德曰既如此請文舉先行容備去公孫瓚處借三五千人馬隨後便來融曰公切勿失信

 

공융이 현덕을 성으로 맞아들여 인사를 마치고 크게 술자리를 베풀어 축하했다. 미축도 불러들여 현덕을 보게 하여 장개가 조숭을 죽인 사건을 말하고, (공융이)

 

이제 조조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서주를 포위하니 급히 와서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도공조(도겸)는 어진 군자인데 뜻밖에 무고한 원한을 받았군요.”

 

하니, 공융이 말하기를,

 

공은 한실의 종친이니, 이제 조조가 백성을 모질게 해치며 힘센 것만 믿고 약자를 업신여기는데, 공께서 저와 함께 가서 구원해야 하지 않겠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제가 감히 사양할 수 없지만 병력이 미약하고 장수도 적으니 쉽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하니, 공융이 말하기를,

 

제가 도공조를 구하려는 건 오랜 우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대의를 위해서요. 어찌 공에게도 의로운 마음이 없겠소?”

 

하였다. 현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문거(공융)께서 먼저 가시고, 저는 공손찬에게 가서 3~5천 인마를 빌려 뒤따라 가게 해주십시오.”

 

하니, 공융이 말하기를,

 

공께서 절대 실언하지 마시오.”

 

하였다.

 

玄德曰公以備爲何如人也聖人云自古皆有死人無信不立劉備借得軍或借不得軍必然親至孔融應允教糜竺先回徐州去報融便收拾起程太史慈拜謝曰慈奉母命前來相助今幸無虞有揚州刺史劉繇與慈同郡有書來喚不敢不去容圖再見融以金帛相酬慈不肯受而歸其母見之喜曰我喜汝有以報北海也遂遣慈往揚州去了不說孔融起兵

 

현덕이 말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떤 사람이라 여기시오? 성인께서 예로부터 사람이란 모두 죽게 마련이지만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하셨소. 저 유비가 군을 빌려 오든 혹시 못 빌려오든 반드시 직접 구원하러 가겠소.”

 

하였다. 공융이 응락하고, 미축에게 먼저 서주로 가서 알리라 한 뒤, 공융도 수습하여 길을 떠났다. 태사자가 절을 올려 사례하며 말하기를,

 

제가 모친의 말씀을 받들어 도우러 왔다가 이제 다행히 염려할 게 없게 되었습니다. 양주자사 유요는 저와 같은 군() 출신이데 서찰을 보내 부르니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하니, 공융이 금과 비단을 주었지만 태사자가 받지 않고 돌아갔다. 그의 모친이 (아들을) 만나 기뻐하며 말하기를,

 

네가 있어 북해(태수)에게 보답하니 기쁘구나!”

 

하였다. 그리고 곧 태사자를 양주로 떠나보냈다. 공융이 (도겸을 도우려) 군사를 일으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且說玄德離北海來見公孫瓚具說欲救徐州之事瓚曰曹操與君無仇何苦替人出力玄德曰備已許人不敢失信瓚曰我借與君馬步軍二千玄德曰更望借趙子龍一行瓚許之玄德遂與關張引本部三千人爲前部子龍引二千人隨後往徐州來卻說糜竺回報陶謙言北海又請得劉玄德來助陳元龍也回報青州田楷欣然領兵來救陶謙心安原來孔融田楷兩路軍馬懼怕曹兵勢猛遠遠依山下寨未敢輕進曹操見兩路軍到亦分了軍勢不敢向前攻城

 

한편, 현덕이 북해를 떠나 공손찬을 만나보고 서주를 구하고 싶다는 것을 갖추어 말하니, 공손찬이 말하기를,

 

조조와 그대는 원수진 게 없는데 어찌 수고스럽게 남을 대신해 나서겠는가?”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제가 이미 허락했으니 실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손찬이 말하기를,

 

기마병과 보병 2천을 빌려주겠네.”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조자룡도 함께 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공손찬 허락하여, 마침내 현덕이 관우 장비과 함께 본디 거느린 3천 명을 앞세우고 자룡이 2천 명을 이끌고 뒤따라 서주로 갔다.

 

한편, 미축이 돌아가 도겸에게 북해에도 이야기하고 유현덕에게도 와서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보고하였다. 진원룡(진등)도 돌아와 청주의 전해가 기꺼이 병력을 이끌고 구하러 올 것이라고 보고하니, 도겸이 안심하였다. 그러나 사실, 공융과 전해의 양 군은 조조의 군세가 대단함을 두려워하여 멀리 산 아래 포진하고 쉽게 전진하지 못했다. 조조도 두 방면에서 군사들이 온 것 보고 군사를 나누어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 성을 공격하지 못했다.

 

卻說劉玄德軍到見孔融融曰曹兵勢大操又善於用兵未可輕戰且觀其動靜然後進兵玄德曰但恐城中無糧難以久持備令雲長子龍領軍四千在公部下相助備與張飛殺奔曹營徑投徐州去見陶使君商議融大喜會合田楷爲掎角之勢雲長子龍領兵兩邊接應是日玄德張飛引一千人馬殺入曹兵寨邊正行之間寨內一聲鼓響馬軍步軍如潮似浪擁將出來當頭一員大將乃是於禁勒馬大叫何處狂徒往那裏去張飛見了更不打話直取於禁兩馬相交戰到數合玄德掣雙股劍麾兵大進於禁敗走張飛當前追殺直到徐州城下

 

각설, 현덕 군이 당도하여 공융을 만나니 공융이 말하기를,

 

조조의 군사가 세력이 대단하고 조조가 또 용병을 잘하니 가볍게 싸울 수는 없소. 동정을 살핀 뒤에 진격해야겠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다만 성안에 양식이 없어서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제가 운장과 자룡에게 명하여 4천 군사로 공의 부하들을 돕고, 저는 장비와 함께 조조 진영을 뚫고 서주성으로 들어가 도겸 사또와 상의하겠습니다.”

 

하니, 공융이 크게 기뻐하며 전해와 함께 회합하여, 군대를 나누어 적을 견제하거나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고, 운장과 자룡이 병력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접응하기로 하였다. 이날 현덕과 장비가 1천 인마를 이끌고 조조 군사의 영채 측면으로 달려드니, 바로 그때 영채 안에서 북소리 크게 일며 기마병과 보병이 조수 물결처럼 장수를 옹위하여 몰려나왔다. 선두의 대장은 우금인데 말 고삐를 당기며 크게 외치기를,

 

어디서 온 미치광이들이냐! 저리 썩 꺼져라!”

 

하였다. 장비가 그것을 보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우금에게 달겨든다. 두 말이 맞붙은 지 몇 합에 현덕이 쌍고검을 뽑아 병력을 지휘하여 크게 진격하니 우금이 패주하였다. 장비가 추격하여 서주성 아래에 도달하였다.

 

城上望見紅旗白字大書平原劉玄德陶謙急令開門玄德入城陶謙接著共到府衙禮畢設宴相待一壁勞軍陶謙見玄德儀表軒昂語言豁達心中大喜便命糜竺取徐州牌印讓與玄德玄德愕然曰公何意也謙曰今天下擾亂王綱不振公乃漢室宗親正宜力扶社稷老夫年邁無能情願將徐州相讓公勿推辭謙當自寫表文申奏朝廷玄德離席再拜曰劉備雖漢朝苗裔功微德薄爲平原相猶恐不稱職今爲大義故來相助公出此言莫非疑劉備有吞並之心耶若舉此念皇天不佑謙曰此老夫之實情也再三相讓玄德那裏肯受糜竺進曰今兵臨城下且當商議退敵之策待事平之日再當相讓可也玄德曰備生遺書於曹操勸令解和操若不從廝殺未遲於是傳檄三寨且按兵不動遣人齎書以達曹操

 

성 위에서 바라보니 붉은 깃발에 흰 글자로 크게 평원 유현덕이라 쓰여 있어 도겸이 급히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현덕이 입성하자 도겸이 영접하고 함께 내아로 들어갔다. 예를 마치고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음식으로) 위로한다. 도겸이 현덕을 만나보니 외모가 훌륭하고 언어가 활달하므로 내심 크게 기뻐하여 미축에게 서주의 관인을 가져오게 하여 현덕에게 넘기려 한다. 현덕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공께서 왜 이러십니까?”

 

하니, 도겸이 말하기를,

 

이제 천하가 요란하고 임금의 기강이 부진한데 공께서 한실 종친이니 마땅히 사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늙은이는 나이 많고 무능하니 진정으로 서주를 양도하고자 합니다. 공은 사양하지 마십시오. 제가 마땅히 표문을 써서 조정에 상주하겠습니다.”

 

하였다. 현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저 유비가 비록 한실의 먼 후손이지만 공은 적고 덕은 엷으므로 평원상도 오히려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제 대의를 위하여 도와주러 온 것인데 공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유비에게 집어삼킬 마음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제가 그런 속셈을 가졌다면 하늘이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도겸이 말하기를,

 

이것은 늙은이의 진정입니다.”

 

하고, 두번 세번 넘겨주려 하지만 현덕이 어찌 기꺼이 받겠는가. 미축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적병이 성 아래 다달았으니 또한 마땅히 적을 물리칠 대책을 상의해야 합니다. 일이 풀린 뒤를 기다렸다가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제가 글을 조조에게 보내 화해를 권하겠습니다. 조조가 만약 따르지 않으면 무찔러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격문을 세 군데 진지(유비, 공융, 전해의 진지)에 보내어 군사를 멈추고 정세를 관망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 글을 가지고 가서 조조에게 전달했다.

 

卻說曹操正在軍中與諸將議事人報徐州有戰書到操拆而觀之乃劉備書也書略曰備自關外得拜君顏嗣後天各一方不及趨侍向者尊父曹侯實因張闓不仁以致被害非陶恭祖之罪也目今黃巾遺孽擾亂於外董卓餘黨盤踞於內願明公先朝廷之急而後私仇撤徐州之兵以救國難則徐州幸甚天下幸甚曹操看書大罵劉備何人敢以書來勸我且中間有譏諷之意命斬來使一面竭力攻城郭嘉諫曰劉備遠來救援先禮後兵主公當用好言答之以慢備心然後進兵攻城城可破也操從其言款留來使候發回書

 

한편, 조조가 군중에서 여러 장수와 함께 의논하는데 서주에서 편지가 왔다고 사람이 알렸다. 조조가 뜯어 보니 유비의 서신이다.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제가 관애 밖에서 공을 만난 뒤 하늘 가에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며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저번에 존부 조후(조숭)께서는 참으로 장개가 어질지 못하여 해를 입은 것이지 도공조(도겸)의 죄가 아닙니다. 지금 황건적의 잔당이 바깥에서 요란하고 동탁의 남은 무리는 안에서 둥지를 틀고 앉았습니다. 바라건대 명공께서 조정의 위급을 우선하시고 사사로운 원수는 뒤로 하십시오. 서주에서 군사를 물려 국난을 구하신다면 서주도 다행이고 천하도 다행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서찰을 보고 난 후 크게 욕하기를,

 

유비 제가 뭐라고 감히 글을 보내 나를 권하냐! 게다가 중간에 슬쩍 비웃고 있구만!”

 

하고, 사자를 참하라 명하고 한편으로 힘껏 성을 공격하라고 한다. 곽가가 간언하기를,

 

유비가 멀리 구원하러 와서 예의를 먼저하고 싸움을 뒤로 했습니다. 주공께서 마땅히 좋은 말로 답을 하여 유비가 방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군사를 내어 성을 공격하면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조조가 그 말에 따라 사자에게 머물러 기다렸다가 회신을 받아가라고 했다.

 

正商議間忽流星馬飛報禍事操問其故報說呂布已襲破兗州進據濮陽原來呂布自遭李郭之亂逃出武關去投袁術術怪呂布反覆不定拒而不納投袁紹紹納之與布共破張燕於常山布自以爲得志傲慢袁紹手下將士紹欲殺之布乃去投張楊楊納之時龐舒在長安城中私藏呂布妻小送還呂布李傕郭汜知之遂斬龐舒寫書與張楊教殺呂布布因棄張楊去投張邈恰好張邈弟張超引陳宮來見張邈宮說邈曰今天下分崩英雄並起君以千裏之衆而反受制於人不亦鄙乎今曹操征東兗州空虛而呂布乃當世勇士若與之共取兗州霸業可圖也

 

막 상의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소식을 전하는 빠른 말이 달려와 재앙을 알렸다. 조조가 까닭을 물으니 여포가 이미 연주를 습격하고 복양으로 진격하여 점거했다고 하였다. 원래 여포는 이각과 곽사의 난을 만나 무관 밖으로 달아나 원술에게 갔다. 원술은 여포가 이랬다 저랬다 일정한 게 없음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아서 원소에게 갔다. 원소가 받아주어서 함께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했다. 여포가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원소의 수하 장사에게 오만하게 대했다. 원소가 죽이려하자 여포는 장양에게 달아나니 장양이 받아들였다. 그때 방서가 장안성 안에서 여포의 처자식을 몰래 데리고 있다가 여포에게 보냈다. 이각과 곽사가 이를 알고 방서를 처형하고 글을 장양에게 보내 여포를 죽이도록 했다. 이에 여포가 장양을 버리고 장막에게 갔다. 때마침 장막의 아우 장초가 진궁을 데려와 장막에게 뵙게하니, 진궁이 장막을 유세하기를,

 

이제 천하가 갈라져 무너지니 영웅이 나란히 일어납니다. 그대가 천리에 걸친 무리를 가지고도 도리어 남에게 제어받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 조조가 동쪽을 치러나가 연주가 비었고 여포는 당세의 용사이니 만약 그와 함께 연주를 취한다면 패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張邈大喜便令呂布襲破兗州隨據濮陽止有鄄城東阿範縣三處被荀彧程昱設計死守得全其餘俱破曹仁屢戰皆不能勝特此告急操聞報大驚曰兗州有失使吾無家可歸矣不可不亟圖之郭嘉曰主公正好賣個人情與劉備退軍去複兗州操然之即時答書與劉備拔寨退兵

 

장막이 크게 기뻐하며 여포에게 연주를 습격하고 이어서 복양도 점거토록 했다. 다만 견성 동아 범현 세 곳만 순욱과 정욱이 계책을 써서 사수하여 온전했고 나머지는 모두 격파됐다. 조인이 거듭 싸웠지만 모두 이기지 못했으므로 특별히 이렇게 위급을 알린 것이었다. 조조가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연주를 잃으면 내게 돌아갈 집이 없어진다. 서둘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니, 곽가가 말하기를,

 

주공께서 유비에게 개인의 정을 내세워 좋게 말씀하시고 퇴군하여 연주로 돌아가십시오.”

 

하니, 조조가 그렇다고 여겨 즉시 답서를 유비에게 보내고 진지를 뽑아 군사를 물렸다.

 

且說來使回徐州入城見陶謙呈上書劄言曹兵已退謙大喜差人請孔融田楷雲長子龍等赴城大會飲宴既畢謙延玄德於上座拱手對衆曰老夫年邁二子不才不堪國家重任劉公乃帝室之胄德廣才高可領徐州老夫情願乞閑養病玄德曰孔文舉令備來救徐州爲義也今無端據而有之天下將以備爲無義人矣糜竺曰今漢室陵遲海宇顛覆樹功立業正在此時徐州殷富戶口百萬劉使君領此不可辭也玄德曰此事決不敢應命陳登曰陶府君多病不能視事明公勿辭玄德曰袁公路四世三公海內所歸近在壽春何不以州讓之孔融曰袁公路塚中枯骨何足掛齒今日之事天與不取悔不可追

 

한편, 사자가 서주로 돌아가서 성에 들어가 도겸을 만나 서찰을 올리니 조조 군사가 이미 퇴각하겠다고 하였다. 도겸이 크게 기뻐하며 공융, 전해, 자룡 등을 성으로 불러 큰 잔치를 열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도겸이 현덕을 상좌에 앉히고 두손을 모아 뭇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나이가 많고 두 아들이 재주가 없어 국가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소. 유공께서 황실의 후예이고 덕이 넓고 재주가 높으니 서주를 다스릴 만하오. 늙은이가 진정으로 쉬면서 병을 다스리고 싶을 뿐이오.”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공문거(공융)께서 저에게 서주로 와서 구원하라 명하신 것은 의로움 때문입니다. 지금 아무 근거도 없이 (서주를) 가진다면 천하가 저를 불의한 사람으로 알 것입니다.”

 

하였다. 미축이 말하기를,

 

이제 한실이 쇠하여 천하가 전복되니 공을 세워 사업을 일으킬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서주는 풍요하고 호구가 백만이니 유사군께서 이곳을 다스리는 걸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현덕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결탄코 감히 명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진등이 말하기를,

 

도부군(도겸)께서 병이 많아서 일을 보기 어려우니 명공께서 사양하지 마십시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원공로(원술)께서 4대에 걸쳐 3공을 지낸 명문이고 천하의 사람들이 따르고 가까이 수춘에 계시는데 어찌 그분께 양도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융이 말하기를,

 

원공로는 무덤 속의 말라비틀어진 뼈와 같으니 어찌 입에 올리겠소! 오늘 일은 하늘이 줘도 안 갖겠다 하시니 후회해도 소용없소.”

 

하였다.

 

玄德堅執不肯陶謙泣下曰君若舍我而去我死不瞑目矣雲長曰既承陶公相讓兄且權領州事張飛曰又不是我強要他的州郡他好意相讓何必苦苦推辭玄德曰汝等欲陷我於不義耶陶謙推讓再三玄德只是不受陶謙曰如玄德必不肯從此間近邑名曰小沛足可屯軍請玄德暫駐軍此邑以保徐州何如衆皆勸玄德留小沛玄德從之陶謙勞軍已畢趙雲辭去玄德執手揮淚而別孔融田楷亦各相別引軍自回玄德與關張引本部軍來至小沛修葺城垣撫諭居民

 

현덕이 고집을 피우며 수긍하지 않으니, 도겸이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버리고 가 버리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하니, 운장이 말하기를,

 

이미 도공께서 양도하시는 걸 받아서 형님이 서주를 맡으시오.”

 

하고, 장비도 말하기를,

 

그리고 이것은 남의 고을을 강제로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께서 호의로써 양도하시는데 하필 굳이 사양하시오?”

 

하였다. 현덕이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불의에 빠뜨리려고 하느냐?”

 

하였다. 도겸이 두 번 세 번 양도하였으나 현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이 말하기를,

 

만약 현덕께서 기어코 (내 제안을) 따르시지 않겠다면 이 근처에 소패라는 고을이 있는데 군대를 주둔할 만합니다. 청컨대 현덕께서 잠시 이 읍에 주둔하여 서주를 보호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모두가 현덕에게 소패에 머물도록 권하므로 유비가 따르기로 했다. 도겸이 군사를 위로한 뒤에 조운이 인사하고 떠나는데, 현덕이 손을 쥐고 눈물 흘리며 헤어졌다. 공융과 전해도 또한 각각 헤어져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현덕이 관우 장비과 함께 본디 거느렸던 군사를 이끌고 소패에 이르러 성벽을 수리하고 백성을 보살폈다.

 

卻說曹操回軍曹仁接著言呂布勢大更有陳宮爲輔兗州濮陽已失其鄄城東阿範縣三處賴荀彧程昱二人設計相連死守城郭操曰吾料呂布有勇無謀不足慮也教且安營下寨再作商議呂布知曹操回兵已過騰縣召副將薛蘭李封曰吾欲用汝二人久矣汝可引軍一萬堅守兗州吾親自率兵前去破曹二人應諾陳宮急入見曰將軍棄兗州欲何往乎布曰吾欲屯兵濮陽以成鼎足之勢宮曰差分薛蘭必守兗州不住此去正南一百八十裏泰山路險可伏精兵萬人在彼曹兵聞失兗州必然倍道而進待其過半一擊可擒也布曰吾屯濮陽別有良謀汝豈知之遂不用陳宮之言而用薛蘭守兗州而行

 

한편, 조조가 회군하니 조인이 맞이하여 여포 세력이 크고, 또 진궁이 보좌하여 연주와 복양을 이미 잃었고, 견성 동아 범현 세 곳만 순욱과 정욱 두 사람이 계책을 짜서 연결한 덕에 성곽을 사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조가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여포는 용맹하지만 꾀가 없으니 걱정할 게 못 된다.”

 

하고, 영채를 세우도록 한 뒤 다시 상의하였다. 여포는 조조가 회군하여 이미 등현을 지난 것을 알고, 부장 설란과 이봉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두 사람을 쓰고 싶은 지 오래였다. 너희가 군사 1만 명을 데리고 연주를 굳게 지켜라. 내가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조조를 격파하러 가겠다.”

 

하였다. 두 사람이 응락하였다. 진궁이 급히 들어와 말하기를,

 

장군께서 연주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여포가 말하기를,

 

내가 복양에 둔병하여 솥발처럼 셋이 맞서는 형세를 이루고 싶소.”

 

하였다. 진궁이 말하기를,

 

틀렸습니다. 설란이 기필코 연주를 지키려해도 지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정남쪽으로 18십 리에 태산의 험로가 있으니 정병 일만을 거기 매복시키십시오. 조조 군이 연주를 잃은 걸 듣고 틀림없이 서둘러 길을 재촉할테니 그들이 반쯤 지나기를 기다려서 일격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니,

 

내가 복양에 주둔하는 것은 따로 좋은 계책이 있어서요. 그대가 어찌 알겠오!”

 

하였다. (여포는) 결국 진궁의 말을 따르지 않고 설란에게 연주를 지키도록 하고 떠났다.

 

曹操兵行至泰山險路郭嘉曰且不可進恐此處有伏兵曹操笑曰呂布無謀之輩故教薛蘭守兗州自往濮陽安得此處有埋伏耶教曹仁領一軍圍兗州吾進兵濮陽速攻呂布陳宮聞曹兵至近乃獻計曰今曹兵遠來疲困利在速戰不可養成氣力布曰吾匹馬縱橫天下何愁曹操待其下寨吾自擒之

 

조조의 병력이 태산 험로에 다다르자 곽가가 말하기를,

 

더 갈 수 없습니다. 여기 복병이 있을 까 두렵습니다.”

 

하니, 조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포는 무모한 놈이니 설란에게 연주를 지키도록 하고 스스로 복양으로 갔을 것이오. 어찌 여기에 매복을 하겠소? 조인에게 일군으로 연주를 포위하게 하고 나는 복양으로 진격하여 속히 여포를 치겠소.”

 

하였다. 진궁이 조조의 군사가 가까이 옴을 듣고 계책을 올리기를,

 

이제 조조의 군대가 멀리 와서 피곤하니 속전이 유리합니다. (저들이) 기력을 양성하게 해선 안 됩니다.”

 

하니, 여포 말하기를,

 

내가 필마로 천하를 종횡했는데 어찌 조조를 근심하겠소! 그들이 진지를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직접 (조조를) 잡겠소.”

 

하였다.

 

卻說曹操兵近濮陽下住寨腳次日引衆將出陳兵於野操立馬於門旗下遙望呂布兵到陣圓處呂布當先出馬兩邊排開八員健將第一個雁門馬邑人姓張名遼字文遠第二個泰山華陰人姓臧名霸字宣高兩將又各引三員健將郝萌曹性成廉魏續宋憲侯成布軍五萬鼓聲大震操指呂布而言曰吾與汝自來無仇何得奪吾州郡布曰漢家城池諸人有分偏爾合得便叫臧霸出馬搦戰曹軍內樂進出迎兩馬相交雙槍齊舉戰到三十餘合勝負不分夏侯惇拍馬便出助戰呂布陣上張遼截住廝殺惱得呂布性起挺戟驟馬沖出陣來夏侯惇樂進皆走呂布掩殺曹軍大敗退三四十裏布自收軍

 

한편, 조조의 병력이 복양 근처에 잠시 머물러 진지를 세웠다. 다음날 무리를 이끌고 나가 들판에 포진했다. 조조가 진문 깃발 아래 말을 세우고 멀리 여포 병력이 도착한 것을 보았다. 둥글게 진을 친 곳에서 여포가 앞장서서 말을 타고 나오고, 양 옆으로 여덟 명의 건장한 장수들이 늘어섰다. 첫째는 안문군 마읍현 사람인 성은 장이고 이름은 요이며 자는 문원이요, 둘째는 태산군 화음현 사람인 성은 장이고 이름은 패이며 자는 선고이니, 두 장수가 또한 각각 세 사람의 건장한 장수를 거느렸는데, 학맹 조성 성렴 위속 송헌 후성이다. 여포의 군사 5만 명이 북소리를 크게 울렸다. 조조가 여포를 손가락질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와 원수진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내 고을을 빼앗았느냐?”

 

하니, 여포가 말하기를,

 

한나라 왕실의 성을 여럿이 나누어 먹는데 너만 가지란 법이 있느냐?”

 

하였다. (여포가) 문득 장패를 고함쳐 출전시켜 싸움을 걸었다. 조조군 안에서 악진이 나가 맞이한다. 두 말이 맞붙어 두 창을 일제히 들었다. 싸운 지 삼십여 합이 되도록 승부가 나지 않자, 하후돈이 말을 박차고 달려나와 싸움을 돕고, 여포 진영에서 장요가 가로막고 싸운다. 성난 여포가 성질이 나서 창을 꼬나들고 말을 몰아 맹렬히 달려나오니, 하후돈과 악진이 모두 달아났다. 여포가 덮치니 조군이 대패하여 삼사십 리를 퇴각했다. 여포도 스스로 군사를 거두었다.

 

曹操輸了一陣回寨與諸將商議於禁曰某今日上山觀望濮陽之西呂布有一寨約無多軍今夜彼將謂我軍敗走必不准備可引兵擊之若得寨布軍必懼此爲上策操從其言帶曹洪李典毛玠呂虔於禁典韋六將選馬步二萬人連夜從小路進發卻說呂布於寨中勞軍陳宮曰西寨是個要緊去處倘或曹操襲之奈何布曰他今日輸了一陣如何敢來宮曰曹操是極能用兵之人須防他攻我不備布乃撥高順並魏續侯成引兵往守西寨

 

조조가 한바탕 지고나서 진지로 돌아가 여러 장수와 상의했다. 우금이 말하기를,

 

제가 오늘 산을 올라 살펴보니 복양 서쪽에 여포의 영채가 하나 있는데 병력이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밤 적장은 아군이 패주한 것을 보고 대비를 하지 않았을 테니 병력을 이끌고 치십시오. 만약 진지를 점령하면 여포 군사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그 말에 따라 조홍 이전 모개 여건 우금 전위 여섯 장수를 데리고 기병과 보병 2만 명을 선발하여 그날 밤 샛길로 출발했다. 한편, 여포가 영채 안에서 군사를 위로(격려)하는데 진궁이 말하기를,

 

서쪽 진지는 요긴한 곳이니 만약 조조가 습격하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여포가 말하기를,

 

그가 오늘 한바탕 패했는데 어찌 감히 오겠소?”

 

하였다. 진궁이 말하기를,

 

조조는 용병에 아주 능한 사람이라 그가 우리의 무방비를 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하니, 여포가 이에 고순과 위속과 후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서쪽 영채를 지키게 하였다.

 

卻說曹操於黃昏時分引軍至西寨四面突入寨兵不能抵擋四散奔走曹操奪了寨將及四更高順方引軍到殺將入來曹操自引軍馬來迎正逢高順三軍混戰將及天明正西鼓聲大震人報呂布自引救軍來了操棄寨而走背後高順魏續侯成趕來當頭呂布親自引軍來到於禁樂進雙戰呂布不住操望北而行山後一彪軍出左有張遼右有臧霸操使呂虔曹洪戰之不利操望西而走忽又喊聲大震一彪軍至郝萌曹性成廉宋憲四將攔住走路衆將死戰操當先沖陣梆子響處箭如驟雨射將來操不能前進無計可脫大叫誰人救我

 

한편, 조조가 황혼 무렵에 군을 이끌고 서쪽 영채에 이르러 사방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영채의 병력은 막아낼 수가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니 조조가 영채를 점령했다. 4(새벽 2)이 되었을 때 고순이 막 군사를 이끌고 와서 쳐들어 왔다. 조조가 직접 군마를 이끌고 나가 고순과 마주쳐 삼군(전군, 중군, 후군)이 뒤섞여 싸웠다. 날이 밝아오자 정서쪽에서 북소리 크게 울리더니 여포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였다. 조조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뒤에는 고순과 위속과 후성이 추격하고, 앞에는 여포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도했다. 우금과 악진이 쌍으로 붙어 여포와 계속 싸웠지만, (막을 수 없자) 조조는 북쪽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산 뒤에서 한 무리 군사가 나오는데, 왼쪽은 장요요 오른쪽은 장패다. 조조가 여건과 조홍에게 싸우게 했지만 불리하여 조조가 서쪽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다시 갑자기 함성이 크게 울리더니 한 무리 군사가 다가왔다. 학맹 조성 성렴 송헌 네 장수가 와서 달아나는 길을 막는다. 여러 장수가 죽기살기로 싸우고 조조도 선두에서 돌진한다. 딱딱이 소리가 나는 곳에서 화살이 소나기 같이 쏟아졌다. 조조가 전진할 수 없고 벗어날 계책이 없어 크게 외치기를,

 

누가 나를 살려달라!”

 

고 했다.

 

馬軍隊裏一將踴出乃典韋也手挺雙鐵戟大叫主公勿憂飛身下馬插住雙戟取短戟十數枝挾在手中顧從人曰賊來十步乃呼我遂放開腳步冒箭前行布軍數十騎追至從人大叫曰十步矣韋曰五步乃呼我從人又曰五步矣韋乃飛戟刺之一戟一人墜馬並無虛發立殺十數人衆皆奔走韋複飛身上馬挺一雙大鐵戟沖殺入去宋四將不能抵擋各自逃去典韋殺散敵軍救出曹操衆將隨後也到尋路歸寨看看天色傍晚背後喊聲起處呂布驟馬提戟趕來大叫操賊休走此時人困馬乏大家面面相覷各欲逃生正是雖能暫把重圍脫只怕難當勁敵追

 

기병 무리에서 한 장수가 뛰어나오니 바로 전위였다. 손에 쌍철극을 쥐고 크게 외치기를,

 

주공은 걱정 마십시오!”

 

하고, 몸을 날려 말에서 내리더니 쌍철극을 땅에 꽂고 표창 열 몇 개를 손바닥에 쥐고 종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들이 십 보 거리에 오면 외쳐라!”

 

하였다. 큰 걸음으로 걸어 화살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포의 군사 십수 기병이 추격하니 종이 크게 외치기를,

 

십 보요!”

 

하니, 전위가

 

오 보면 바로 외쳐라!”

 

하자, 종이 다시 말하기를,

 

오 보요!”

 

했다. 전위가 표창을 날리니 표창 하나에 한 사람씩 말에서 떨어지고 잘못 맞는 것이 없으니 선 채로 십수 명을 죽였다. 무리가 모두 달아나니, 전위가 다시 몸을 날려 말을 타고 큰 철극 두 자루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학맹 조성 성렴 송헌 네 장수가 감당하지 못하고 각각 달아났다. 전위가 적군을 죽여서 흩어버리고 조조를 구출하고 여러 장수도 뒤따라 도착하여 길을 찾아 진지로 돌아간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는데 배후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곳에 여포가 말을 달려 방천화극을 들고 쫓아오며 크게 외치기를,

 

조조 도적은 달아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사람도 말도 지쳐 모두들 서로 훔쳐볼 뿐 각각 달아나 목숨만 건지려 하였다. 이야말로, 비록 중첩된 포위를 잠깐 뚫고 탈출했지만 굳센 적이 쫓는 걸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네.

 

不知曹操性命如何且聽下文分解

 

조조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의 이야기를 들으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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