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 그윽한 집[幽居 유거]
1004. 그윽한 집[幽居 유거]
寂寂揜門城市賖, 晴牕時復讀南華. 年來謝客貪看竹, 秋後忘餐事採花. 藥餌何曾休白髮, 詩書終不救貧家. 堦南擬種靑桐樹, 贏得新陰滿院斜. |
호젓이 문을 닫고 있으니 성시가 멀어, 밝은 창 아래 때때로 남화경을 다시 읽노라. 근년 들어 손님 끊고 대 보느라 정신없거니와, 가을 되자 끼니도 잊고 꽃 따느라 바쁘다오. 약 먹는다고 느는 백발을 어이 멈추리, 책 읽어도 가난은 끝내 구제할 수 없다마다. 양지바른 섬돌 밑에 오동나무 심어서, 뜰안 가득 새 그늘을 실컷 드리우고 싶네. 적적엄문성시사, 청창시부독남화. 연래사객탐간죽, 추후망찬사채화. 약이하증휴백발, 시서종불구빈가. 계남의종청동수, 영득신음만원사. |
장혼(張混·1759~1828), 『이이엄집(而已广集)』 권7 「그윽한 집(幽居)」 |
장혼(張混), 이 이름에서 벌써 한 폭의 그림 같은 삶이 그려지지 않나? 한양(漢陽)의 서쪽, 인왕산(仁王山) 밑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간 이 중인의 삶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다. 그는 어려서 개에게 물려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인생의 고난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글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장혼(張混)의 삶은 단지 힘든 현실을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에 매진하여 32살에 비록 낮은 벼슬, 감인소(監印所)의 사준(司準)이라는 종8품 말단 직책을 얻었지만,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 58살까지 일했다. 특히 그의 교정(校訂) 능력은 정조(正祖)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종이와 잉크 사이에서 그의 날카로운 눈과 섬세한 손길은 빛을 발했다. 그럼에도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을 택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가 살던 서촌(西村), 오늘날의 필운동(弼雲洞), 누각동(樓閣洞), 인왕동(仁王洞) 등은 사대부들과 왕족이 풍경 좋은 곳을 차지한 사이로 중인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천수경(千壽慶), 김낙서(金洛瑞),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같은 중인 친구들과 교류하며 시모임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했다. 이 모임은 당시 장안(長安)에서 꽤 유명했으니, 서촌의 이들 중인들은 단순한 하위 계층이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들이었다.
장혼(張混)은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詩人)답게 자신의 이상향을 상상했다. 그는 자신의 꿈꾸는 집을 「평생지(平生志)」라는 글을 통해 묘사하며, 그 집의 이름을 '이이엄(而已广)'이라 붙였다. '이이(而已)'는 '그뿐이다' 또는 '그만이다'라는 뜻을 가진 한문 어조사(語助辭)인데, 이는 장혼(張混)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오직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삶,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철학이 녹아 있는 것이다.
장혼(張混)이 사는 집은 자연과 조화된 곳이었다. 그는 북송(北宋)의 시인 소식(蘇軾)이 "밥에 고기가 없는 건 괜찮지만, 대나무가 없는 건 참을 수 없다. 고기 없으면 사람은 파리하게 될 뿐이지만, 대나무 없으면 사람은 속되게 된다(可使食無肉, 不可使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고 읊은 것처럼, 대나무와 함께하는 삶을 동경했다. 또한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이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며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했듯이, 장혼(張混)도 그와 같은 여유로움을 즐기며,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원했다.
장혼(張混)의 삶은 속절없이 늙어가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품었을지 몰라도, 그가 선택한 길은 세속적인 성공 대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대신, 그는 오동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묻혀 사는 삶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