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섣달 그믐 술자리[除夕飮 제석음]
城塵十丈浮軟紅, 爭名射利汨西東. 獨怪吾宗諸夫子, 作閑淡事熱閙中. 閑淡積來味啖蔗, 熱閙經盡迹飛鴻. 梅花會後除夕飮, 次第取樂眞無窮. |
도성에는 열 길 높이 부연 먼지 떠오르며, 명예 다투고 이익 좇아 동과 서로 뛰어다니네. 정말 이상하다 우리 집안 형님들은, 그 바쁜 세상에서 담백한 모임 가지네. 담백한 모임은 거듭 하면 깊은 맛이 우러나나, 바쁜 일은 겪고 나면 흔적조차 사라지네. 매화 모임 하고 나자 그믐날의 술자리, 차례대로 즐기면서 끝없이 이어가리. 성진십장부연홍, 쟁명사리골서동. 독괴오종제부자, 작한담사열료중. 한담적래미담자, 열료경진적비홍. 매화회후제석음, 차제취락진무궁. |
조귀명(趙龜命·1693~1737) 섣달 그믐에[除夕飮 제석음] |
조귀명(趙龜命)은 1693년에 태어나 1737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영조(英祖) 초기의 명문장가로, 그의 글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그가 쓴 "제석음(除夕飮)"이라는 시는 섣달 그믐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쓴 시로, 당시의 자신과 가까운 친척들이 매화회(梅花會)라는 특별한 모임을 가졌던 그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는 그의 삶의 여유와, 또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면모가 엿보인다.
이 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경쟁에 휘말려 다들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결국 그런 바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에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1. 도성에는 열 길 높이 부연 먼지 떠오르며
먼저 시의 첫 번째 구절에서는 "城塵十丈浮軟紅 성진십장부연홍"이라고 한다. 여기서 '城塵'은 '도성의 먼지'를 의미하는데, 이 표현은 당시 서울, 즉 한양의 번잡하고 혼잡한 도시 풍경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十丈'은 길이가 열 길이나 되는 먼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도시가 얼마나 혼잡하고, 사람들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浮軟紅'은 '부유하는 부드러운 붉은 먼지'라는 뜻으로,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경쟁을 묘사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부연 먼지"는 마치 바쁘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란스럽고, 또 혼잡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바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쟁명사리(爭名射利)" 즉, '명예와 이익을 다투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다. 사람들은 명성과 이익을 위해 동과 서로 뛰어다니지만, 결국 그런 경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세상의 복잡함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놓치기 쉽다.
2. 정말 이상하다 우리 집안 형님들은
그 다음 구절, "獨怪吾宗諸夫子 독괴오종제부자"에서는 '정말 이상하다 우리 집안 형님들은'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집안 사람들, 즉 친척들이 어떻게 여유로운 삶을 사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宗'은 '종족'이나 '집안'을 의미하고, '諸夫子'는 '형님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시인은 이 집안의 사람들은 남들처럼 명예와 이익을 좇기보다는 담백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고 말한다.
"작한담사열료중(作閑淡事熱閙中)" 이 구절은 '바쁜 세상에서 담백한 일을 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바쁜 세상'과 '담백한 일'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을 대비시킨다. 세상은 온통 경쟁과 바쁨에 휘말려 있는데, 그와는 달리 집안의 형님들은 여유를 가지고 담백한 일을 하며, 이러한 여유로움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한담(閑淡)'이라는 말 자체가 고요하고, 담백하며, 무엇보다 여유를 의미하는데, 이런 삶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3. 담백한 모임의 깊은 맛
다음 구절에서 시인은 "閑淡積來味啖蔗 한담적래미담자"라고 말하며, '담백한 모임'이 쌓여서 '깊은 맛'을 낸다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 '한담'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담백한'이란 말이 그 자체로 '심플하고, 소박하고, 여유로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담백한 모임은 계속하면 할수록 그 맛이 깊어진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즉,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그 모임 자체가 어떤 맛이나 감동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임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열료경진적비홍(熱料經盡迹飛鴻)"에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시인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즉 '열료(熱料)'는 결국 지나가고 나면 '흔적조차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유적으로 '비홍' 즉, '날아가는 기러기'의 흔적을 예로 들면서, 지나간 시간이나 바쁜 일들은 결국 지나가고 나면 흔적만 남고,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사실을 지적한다.
4. 매화회 후 그믐날 술자리
그리고 나서 "梅花會後除夕飮"에서 시인은 매화회(梅花會)를 언급하며, 그 후의 제석음(除夕飮), 즉 섣달 그믐날 술자리를 말한다. 사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연말에 친척들과 함께 나누었던 술자리에서 느낀 여유로움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매화회는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갖는 모임인데, 그 뒤의 술자리는 또 다른 형태의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이런 자리가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느낀다.
"차제취락진무궁(次第取樂眞無窮)"은 '차례차례 즐기면서 끝없이 즐긴다'는 뜻이다. 즉, 그는 이 술자리가 끝없이 이어지며, 그 속에서 진정한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시인이 그 당시의 여유로운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 모임이 주는 의미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론
이 시에서 조귀명(趙龜命)은 바쁘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는 매화회와 제석음이라는 담백한 모임을 통해 경쟁과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소소한 기쁨과 여유로운 만남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세상은 바쁘고 시끄럽지만, 그 안에서 담백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