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漢詩 한 수/10월의 漢詩

1025. 백로의 진심[蓼花白鷺 요화백로]

진현서당 2024. 10. 16. 04:54

 



前灘富魚蝦,
有意劈波入,
見人忽驚起,
蓼岸還飛集,
翹頸待人歸,
細雨毛衣濕,
心猶在灘魚,
人導忘機立.



앞 여울에 물고기 하도 많아서,
마음먹고 물결 가르며 날아들려다,
사람 보고 별안간에 너무 놀라서,
여뀌 핀 언덕으로 되려 날아와,
목 뺀 채로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가랑비에 털옷은 자꾸 젖지만,
마음 외려 여울 고기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욕심 잊고 서 있다 하네.


전탄부어하, 유의벽파입,
견인홀경기, 요안환비집,
교경대인귀, 세우모의습,
심유재탄어, 인도망기립.

이규보(李奎報·1168~1241) <방장 월사의 그림 족자를 읊은 2[月師方丈畫簇二詠]> 2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蓼花白鷺]> 동국이상국집전집(東國李相國全集)2, 고율시(古律詩)

 

고려 시인 이규보(李奎報)의  <蓼花白鷺>입니다. 이 시()는 이름 그대로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풍경 속에 이규보는 아주 묘한 반전을 숨겨두었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백로의 이중성, 첫 번째 장면 (場面)

 

()의 시작은 꽤나 평화롭습니다. “前灘富魚蝦, 有意劈波入.” “앞 여울에는 물고기와 새우가 아주 많아서, 우리 백로가 마음먹고 물결을 가르며 날아들려다, 벌써부터 백로의 의도가 느껴지죠? ‘여울에 고기들이 잔뜩 몰려있네! 오늘 저녁은 푸짐하겠어!’ 하고 날아가려던 백로.

그러나 見人忽驚起, 蓼岸還飛集.”,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라, 여뀌 핀 언덕으로 되돌아와 앉았네.” 그야말로 백로도 연기력 하나는 출중합니다. ‘어머, 내가 먹이 잡으려고 했던 거 절대 아니야! 난 원래 여기서 우아하게 서 있는 거였어!’ 하고는 사람을 보자마자 당황한 척,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되돌아가버립니다. 이게 바로 가식의 시작입니다.

 

목 빼고 기다리기: 백로의 연기파 인생

 

()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翹頸待人歸, 細雨毛衣濕.”, “목을 길게 빼고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가랑비에 털옷은 자꾸만 젖네.” 이 대목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이유는 백로가 아주 인내심 있게,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저 사람들이 떠날 거야. 그리고 난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목을 쭉 뺀 채 비를 맞고 서 있다는 겁니다.

백로의 인내력은 그야말로 무릎 꿇고 기다리는수준입니다. 참 불쌍해 보이지만, 사실은 탐욕과 속임수의 대가죠. 이규보는 이를 통해 백로의 정체를 하나하나 파헤칩니다.

 

백로의 진심: 가식의 끝을 보다

 

이제 드디어 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心猶在灘魚, 人導忘機立.” “마음은 여전히 여울의 물고기에 두면서도, 사람들은 백로가 탐욕을 잊고 그저 서 있다고 생각하네.”

이규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저 백로가 깨끗하고 우아한 존재일까? 아니면 속으로는 여울 속 물고기만 생각하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백로가 그저 순결하고 청렴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백로는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겁니다. 마치 순결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저 인간들 언제 가나하고 기다리는 백로의 탐욕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죠.

 

백로의 캐릭터 분석: 우아한 척, 탐욕에 가득 찬 (假面의 달인)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로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뒤집어버렸다는 점입니다. 흔히 백로(白鷺)는 우아하고 청렴하고 순수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이규보의 시에서는 탐욕과 가식의 화신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백로가 그저 청렴하고 단정하게 서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물고기 한 마리를 더 먹어보려 목 빼고 기다리는 것이죠.

이규보는 단순히 그림을 보고 이런 시상을 떠올린 것이 아닙니다. 여뀌꽃 사이에 서 있는 백로의 모습에서 인간의 가식을 읽어낸 겁니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 진짜 일 열심히 하고 있어!” 하고 열심히 타자 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뒷구멍으로 인터넷 쇼핑 중인 직장인의 모습과도 같죠.

 

이규보의 속마음: 풍자와 통찰 (寓諷意)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두고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한 듯이 사는 것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풍자의 뜻이 담겨 있다[此所謂貪夫若廉, 而人不知也, 寓諷意]”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시는 그동안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백로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 속에 담긴 인간의 가식과 탐욕을 예리하게 풍자한 것입니다.

결국, ‘백로는 단순히 새가 아닙니다.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으론 욕심 가득한, 우리 주변의 누군가일지도 모르죠. 이규보의 날카로운 시선이 백로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재치 있게 비춘다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백로처럼 가식으로 살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반성해 보시길. 그리고 만약 오늘 누군가가 우아하게 서 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세요. ‘혹시, 속으로 물고기 생각 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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