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나관중/제4권 삼국지연의 나관중

제38회 융중에서 삼분천하의 계책을 정하고, 손권이 장강에서 싸워 원수를 갚다.

진현서당 2024. 10. 14. 00:53

第三十八回

定三分隆中決策 戰長江孫氏報仇

 

38

융중에서 삼분천하의 계책을 정하고, 손권이 장강에서 싸워 원수를 갚다.

 

卻說玄德訪孔明兩次不遇欲再往訪之關公曰兄長兩次親往拜謁其禮太過矣想諸葛亮有虛名而無實學故避而不敢見兄何惑於斯人之甚也玄德曰不然昔齊桓公欲見東郭野人五反而方得一面況吾欲見大賢耶張飛曰哥哥差矣量此村夫何足爲大賢今番不須哥哥去他如不來我只用一條麻繩縛將來玄德叱曰汝豈不聞周文王謁薑子牙之事乎文王且如此敬賢汝何太無禮今番汝休去我自與雲長去飛曰既兩位哥哥都去小弟如何落後玄德曰汝若同往不可失禮飛應諾

 

각설, 현덕이 공명을 두 번이나 찾아가 만나지 못하고 다시 찾아가려고 하자 관우가 말하기를,

 

형님께서 두번이나 몸소 찾아 뵈러 갔으니 그 예의가 너무 지나치오. 생각해 보면, 제갈량은 헛된 명성만 있을 뿐 실제 학문은 없어 일부러 피해 감히 만나지 못하는 것이오. 형께서 어찌 이런 사람에게 미혹되시는 것이 심합니다!”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에 제나라 환공이 동곽의 촌사람을 만나려 해도 다섯번이나 되돌아오고서야 비로소 한번 만날 수 있었다. 하물며 내가 뛰어나게 어진 사람을 만나려 하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했다. 장비가 말하기를,

 

형님이 틀렸소! 그 촌뜨기를 헤아리건대 어찌 족히 뛰어난 어진 사람이겠소? 이번에 형님이 가실 것 없이, 그 자가 안 오면 내가 한 줄기 삼끈으로 묶어 오겠소!”

 

했다. 현덕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주나라 문왕이 강자아(강태공)를 만난 일을 듣지 못했느냐? 문왕조차도 그렇게 어진 이를 공경했는데 너희가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이번에 너는 (함께) 가지 마라. 내가 운장과 함께 가겠다.”

 

하니, 장비가 말하기를,

 

두 형님이 모두 가시는데 아우가 어찌 뒤에 떨어져 남겼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같이 갈 것이면 예를 잃지 말아라.”

 

하니, 장비가 응락했다.

 

於是三人乘馬引從者往隆中離草廬半裏之外玄德便下馬步行正遇諸葛均玄德忙施禮問曰令兄在莊否均曰昨暮方歸將軍今日可與相見言罷飄然自去玄德曰今番僥幸得見先生矣張飛曰此人無禮便引我等到莊也不妨何故竟自去了玄德曰彼各有事豈可相強三人來到莊前叩門童子開門出問玄德曰有勞仙童轉報劉備專來拜見先生童子曰今日先生雖在家但今在草堂上晝寢未醒玄德曰既如此且休通報分付關張二人只在門首等著玄德徐步而入見先生仰臥於草堂幾席之上玄德拱立階下

 

이에 세 사람이 말을 타고 하인을 이끌고 융중으로 갔다. 초가집에서 반 리쯤 떨어진 곳에서 현덕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마침 제갈균을 만났다. 현덕이 황망히 인사를 하고 묻기를,

 

오늘 형께서 집에 계시지 않습니까?”

 

하니, 제갈균이 말하기를,

 

어제 저녁 막 돌아왔습니다. 장군께서 오늘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훌훌 떠나갔다. 현덕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요행히 선생을 만나게 됐구나!”

 

하니, 장비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무례하네요. 우리를 안내해서 집으로 데려가도 괜찮은데, 무슨 까닭으로 자기 혼자 가버린단 말이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각자 사정이 있을텐데 어찌 억지로 그리 하겠느냐?”

 

했다. 세 사람이 집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니 동자가 문을 열고 나와서 물었다. 현덕이 말하기를,

 

수고스럽겠다만 동자가 선생께 가서, 유비가 선생을 만나 뵈러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씀드려라.”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께서 비록 집에 계시나, 이제 초당에서 낮잠을 주무셔 아직 깨지 않으셨습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잠시 통보를 멈추어라.”

 

하고, 관우와 장비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문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현덕이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니 선생은 초당 돗자리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현덕이 두손을 모아 섬돌 아래에 섰다.

 

半晌先生未醒張在外立久不見動靜入見玄德猶然侍立張飛大怒謂雲長曰這先生如何傲慢見我哥哥侍立階下他竟高臥推睡不起等我去屋後放一把火看他起不起雲長再三勸住玄德仍命二人出門外等候望堂上時見先生翻身將起忽又朝裏壁睡著童子欲報玄德曰且勿驚動又立了一個時辰

窗外日遲遲

 

한동안 선생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관우와 장비가 밖에서 오래 서 있어서 동정을 살필 수 없어 들어가 현덕을 보니 여전히 지키고 서 있었다. 장비가 크게 노하여 운장에게 일러 말하기를,

 

저 선생이 어찌 저렇게 오만하오! 보자니 형님께서는 섬돌 아래 지켜 서 있고 그는 높이 누워 자면서 일어나지 않는구려! 우리가 집 뒤로 가서 불을 질러 그가 일어나나 안 일어나나 봅시다!”

 

하니, 운장이 거듭 말렸다. 현덕이 다시 두 사람에게 문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명했다. 초당 위를 올려다보니 선생이 몸을 돌려 일어나는가 싶더니 문득 다시 안쪽 벽을 보고 잠이 들었다. 동자가 알리려 하자 현덕이 말하기를,

 

놀라게 하지 말아라.”

 

했다. 다시 한 시진(두 시간)을 더 서서 기다려서야

 

孔明才醒口吟詩曰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공명이 깨어나 시를 읊기를,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울까?

평소 내 스스로 알았네.

초당에서 봄꿈은 족하고

창밖 해는 느릿느릿하구나.”

 

했다.

 

孔明吟罷翻身問童子曰有俗客來否童子曰劉皇叔在此立候多時孔明乃起身曰何不早報尚容更衣遂轉入後堂又半晌方整衣冠出迎玄德見孔明身長八尺面如冠玉頭戴綸巾身披鶴氅飄飄然有神仙之概玄德下拜曰漢室末胄涿郡愚夫久聞先生大名如雷貫耳昨兩次晉謁不得一見已書賤名於文幾未審得入覽否孔明曰南陽野人疏懶性成屢蒙將軍枉臨不勝愧赧

 

공명이 읊고나서 몸을 돌려 동자에게 묻기를,

 

세속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유황숙께서 오셔서 서서 기다리신 지 오랩니다.”

 

했다. 이에 공명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어째서 일찍 알리지 않았느냐! 일단 옷을 갈아 입어야겠구나.”

 

하고, 곧 후당으로 들어가 다시 한참 지나서야 옷과 갓을 차려 입고 나와서 맞이했다. 현덕이 공명을 보니 키가 8척이요 얼굴은 관옥 같고 머리에 윤건을 쓰고 몸에 학창의를 입어서 바람에 날리듯 신선의 기품이 풍겼다. 현덕이 허리 굽혀 인사하고 말하기를,

 

한실의 보잘것없는 후예, 탁군의 어리석은 사내가 오래전부터 선생의 큰 명성을 우레처럼 들어왔습니다. 전날에 두 차례 찾아와 만나 뵈려 했으나 만나지 못해 그때 천한 이름을 책상에 남겼는데 아직 읽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니, 공명이 말하기를,

 

저는 남양 땅의 야인이고 게으른 것이 천성이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거듭 왕림해 주시니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二人敘禮畢分賓主而坐童子獻茶茶罷孔明曰昨觀書意足見將軍憂民憂國之心但恨亮年幼才疏有誤下問玄德曰司馬德操之言徐元直之語豈虛談哉望先生不棄鄙賤曲賜教誨孔明曰德操元直世之高士亮乃一耕夫耳安敢談天下事二公謬舉矣將軍奈何舍美玉而求頑石乎玄德曰大丈夫抱經世奇才豈可空老於林泉之下願先生以天下蒼生爲念開備愚魯而賜教孔明笑曰願聞將軍之志玄德屏人促席而告曰漢室傾頹奸臣竊命備不量力欲伸大義於天下而智術淺短迄無所就惟先生開其愚而拯其厄實爲萬幸

 

두 사람이 예를 갖춰 인사하고 손님과 주인 자리로 나눠 앉았다. 동자가 차를 바쳤다. 차를 마신 후 공명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남기신 글의 뜻을 살피오니, 장군께서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시는 마음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다만 제가 어리고 재주가 모자라 잘못 물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사마덕조나 서원직의 말이 어찌 허튼 이야기이겠습니까? 저를 비천하다 버리지 마시고 아무쪼록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공명이 말하기를,

 

사마덕조나 서원직은 당세의 뛰어난 선비입니다. 저는 밭이나 가는 농부일 뿐이니 어찌 천하의 일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두분께서 잘못 천거하셨습니다. 장군께서 어찌 아름다운 구슬을 버리고 쓸모없는 돌을 구하십니까?”

 

하니, 현덕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을 다스릴만한 재주를 갖고서 어찌 자연 속에 묻혀 헛되이 늙어가겠습니까? 바라건대 선생께서 천하의 백성들을 생각하셔서 저의 우둔함을 깨우쳐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공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군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현덕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리를 당겨 앉아 고하여 말하기를,

 

한실이 기울어 무너지고 간신이 국가권력을 빼앗았습니다. 제가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하나 지혜와 책략이 얕고 짧아서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선생께서 저의 우매함을 깨우쳐 재앙에서 건져주신다면 참으로 만번 다행이겠습니다.”

 

했다.

 

孔明曰自董卓造逆以來天下豪傑並起曹操勢不及袁紹而竟能克紹者非惟天時抑亦人謀也今操已擁百萬之衆挾天子以令諸侯此誠不可與爭鋒孫權據有江東已曆三世國險而民附此可用爲援而不可圖也荊州北據漢利盡南海東連吳會西通巴此用武之地非其主不能守是殆天所以資將軍將軍豈有意乎益州險塞沃野千裏天府之國高祖因之以成帝業今劉璋暗弱民殷國富而不知存恤智能之士思得明君將軍既帝室之胄信義著於四海總攬英雄思賢如渴若跨有荊保其岩阻西和諸戎南撫彝外結孫權內修政理待天下有變則命一上將將荊州之兵以向宛將軍身率益州之衆以出秦川百姓有不簞食壺漿以迎將軍者乎誠如是則大業可成漢室可興矣此亮所以爲將軍謀者也惟將軍圖之

 

공명이 말하기를,

 

동탁이 반역한 뒤로부터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났습니다. 조조는 세력이 원소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긴 것은 오로지 하늘이 도와서만이 아니라 사람의 책략에서 이긴 까닭도 있습니다. 이제 조조가 벌써 백만의 무리를 가진데다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니 이것은 참으로 더불어 창칼을 겨눌 수가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한 지 벌써 3대에 이르고 나라는 험준하고 백성이 따르니 이것은 원조를 삼을 것이지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는 북으로 한수와 면수에 의지하고 남쪽 바다에 이르는 이익을 모두 가지며, 동쪽으로 오군과 회계군에 잇닿았고, 서쪽으로 파촉 지방과 통하니 이것은 전쟁하기 좋은 땅이지 주인이 능히 지킬 곳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의 하늘이 장군께 내린 것인데 장군께서 어찌 뜻이 없으십니까? 익주는 지형이 험준한 요새이고 기름진 땅이 천 리라 하늘이 내린 땅입니다. 고조(유방)는 거기에서 황제가 되는 사업을 이루셨습니다. 지금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여 백성은 충실하고 나라는 부유하지만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을 알지 못하여, 지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밝은 군주를 바라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황실의 후예이신데다 신의가 사해에 현저하고 영웅들을 거느리고 어진이를 생각하시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하십니다. 만약 형주와 익주를 걸터앉듯 얻는다면, 그 험난한 땅을 지키고 서융의 오랑캐들과 화친하며 남쪽으로 이와 월의 오랑캐들을 달래고, 바깥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 정치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천하의 변고를 기다렸다가 즉시 뛰어난 장수에게 명해 형주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양과 낙양으로 향하게 합니다. 장군께서 몸소 익주의 대군을 거느리고 진천으로 나가시면 백성들 가운데 밥을 싸들고 나와 장군을 맞이하지 않을 이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다면 가히 대업을 이루어서 한실을 중흥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장군을 위해 꾀하는 것입니다. 장군께서 이것을 도모하십시오.”

 

했다.

 

言罷命童子取出畫一軸掛於中堂指謂玄德曰此西川五十四州之圖也將軍欲成霸業北讓曹操占天時南讓孫權占地利將軍可占人和先取荊州爲家後即取西川建基業以成鼎足之勢然後可圖中原也玄德聞言避席拱手謝曰先生之言頓開茅塞使備如撥雲霧而睹青天但荊州劉表益州劉璋皆漢室宗親備安忍奪之孔明曰亮夜觀天象劉表不久人世劉璋非立業之主久後必歸將軍玄德聞言頓首拜謝只這一席話乃孔明未出茅廬已知三分天下真萬古之人不及也

 

말을 마치자 동자에게 명해 그림 한 폭을 꺼내서 중당에 걸고 현덕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이 서천 54주의 지도입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북으로 조조에게 천시(하늘이 내린 기회)를 가지도록 양보하고, 남으로 손권에게 지리(지리적 우세)를 가지도록 양보하며, 장군께서는 가히 인화(사람들의 화합)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 형주를 취해 내 집으로 만든 뒤 즉시 서천을 취해 토대를 세워서 정족지세(鼎足之勢 솥의 세다리처럼 맞선 형세)를 이뤄야 가히 중원을 도모할 만합니다.”

 

하니, 현덕이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을 모아 사례해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으로 막혔던 것이 갑자기 열리니, 저로 하여금 구름과 안개가 걷혀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같게 하였습니다. 다만 형주의 유표나 익주의 유장이 모두 한실의 종친이라 제가 어찌 차마 빼앗겠습니까?”

 

하니, 공명이 말하기를,

 

제가 밤에 천상(천문)을 살피니 유표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뜰 것입니다. 유장은 대업을 이룰 군주가 아니므로 결국 장군께 넘어오고야 말 것입니다.”

 

했다. 현덕이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사례했다. 이 자리의 이야기는 바로 공명이 초가집을 떠나기 전에 이미 천하를 셋으로 나눌 것을 안 것이니 참으로 만고에 걸쳐 아무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後人有詩贊曰

 

豫州當日歎孤窮

何幸南陽有臥龍

欲識他年分鼎處

先生笑指畫圖中

 

뒷날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유예주 당시 외롭고 어려운 것을 한탄하다가,

다행히 남양 땅에 와룡선생을 만났네.

다른 날 정족지세(鼎足之勢)로 나뉠 것을 알고 싶거늘,

선생은 웃으며 지도를 가리키네.”

 

하였다.

 

玄德拜請孔明曰備雖名微德薄願先生不棄鄙賤出山相助備當拱聽明誨孔明曰亮久樂耕鋤懶於應世不能奉命玄德泣曰先生不出如蒼生何言畢淚沾袍袖衣襟盡濕孔明見其意甚誠乃曰將軍既不相棄願效犬馬之勞玄德大喜遂命關張入拜獻金帛禮物孔明固辭不受玄德曰此非聘大賢之禮但表劉備寸心耳孔明方受於是玄德等在莊中共宿一宵次日諸葛均回孔明囑付曰吾受劉皇叔三顧之恩不容不出汝可躬耕於此勿得荒蕪田畝待我功成之日即當歸隱

 

현덕이 절하고 공명에게 청하기를,

 

제가 비록 명성도 미미하고 덕도 박하지만 바라건대 선생께서 비천한 저를 버리지 말고 산을 나와 도와 주십시오. 제가 마땅히 손을 모아 선생의 가르침을 듣겠습니다.”

 

하니, 공명이 말하기를,

 

저는 오랫동안 밭갈고 김매기를 즐기고 세상에 적응하는 것에 게을러서 능히 명을 받들지 못합니다.”

 

했다. 현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선생께서 나오지 않으시면 백성은 어찌합니까?”

 

하고, 말을 마치니 눈물이 옷소매를 적셔서 옷깃이 모두 젖었다. 공명이 그 뜻이 매우 정성스러운 것을 보고 말하기를,

 

장군께서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바라건대 견마지로(犬馬之勞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함)를 다하겠습니다.”

 

했다. 현덕이 크게 기뻐하며 곧 명을 내려 관우와 장비를 들어오게 하여, 절하고 금과 비단을 예물로 바쳤다. 공명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자 현덕이 말하기를,

 

이것은 뛰어나게 어진 사람을 초빙하는 예물이 아니라 다만 유비의 작은 정성을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공명이 그제서야 받았다. 이에 현덕 일행이 그 집에서 함께 하룻밤을 함께 묵었다. 이튿날 제갈균이 돌아오자 공명이 당부하여 말하기를,

 

내가 유황숙의 세 번을 찾아온 은혜를 입어서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여기서 몸소 농사를 지어 논밭을 황무지로 만들지 말아라. 내가 공을 이룬 뒤에 돌아와서 은거하겠다.”

 

하였다.

 

後人有詩歎曰

 

身未升騰思退步

功成應憶去時言

只因先主丁寧後

星落秋風五丈原

 

뒷날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감탄하기를,

 

몸이 날아오르기에 앞서 물러남을 생각했으니,

공을 이뤘으면 응당 그때의 말을 기억했으리라.

오직 선주(유비)가 간절히 부탁한 뒤에,

오장원에 별은 떨어지고 가을바람은 쓸쓸했네.”

 

라고 했다.

 

又有古風一篇曰

 

高皇手提三尺雪芒碭白蛇夜流血

平秦滅楚入鹹陽二百年前幾斷絕

大哉光武興洛陽傳至桓靈又崩裂

獻帝遷都幸許昌紛紛四海生豪傑

曹操專權得天時江東孫氏開鴻業

孤窮玄德走天下獨居新野愁民厄

南陽臥龍有大志腹內雄兵分正奇

只因徐庶臨行語茅廬三顧心相知

先生爾時年三九收拾琴書離隴畝

先取荊州後取川大展經綸補天手

縱橫舌上鼓風雷談笑胸中換星鬥

龍驤虎視安乾坤萬古千秋名不朽

 

또 고풍(고시) 한 편을 짓기를,

 

고황제(유방)께서 눈처럼 하얀 칼 빼어들고, 망탕산에서 흰 뱀을 베어 피가 흘렀네.

진나라와 초나라를 멸해서 함양에 들어갔으나, 이백년 전에 왕업 거의 끊어질 뻔했네.

크구나! 광무께서 낙양에서 중흥했으나, 환제와 영제에 이르러 또 무너졌네.

헌제가 천도해서 허창으로 가지만, 어지러이 사해에서 호걸들 일어났네.

조조가 권력을 장악해 천시를 얻었고, 강동에서 손씨가 큰 사업을 열었는데,

외롭고 어려운 현덕은 천하를 떠돌다가, 홀로 신야에서 백성의 곤액을 걱정했네.

남양의 와룡선생이 커다란 뜻을 가지고, 웅대한 전략 품고 병법에 능통하네.

서서가 현덕을 떠나가며 (추천의) 말을 남겨, 초가집을 세번 찾아온 마음을 알았네.

선생이 이때 나이가 스물일곱 살인데, 거문고와 책을 챙겨 논밭을 떠났네.

먼저 형주를 취한 뒤에 서천을 취하여, 경륜을 크게 펼쳐 세상을 구하리라.

종횡무진하여 혀끝에서 바람과 우레가 일고, 담소하는 가슴 속에서 우주를 바꾸네.

용처럼 달리고 범처럼 노려보며 천하를 안정시키니, 만고천추(萬古千秋) 그 이름이 썪지 않으리라.”

 

하였다.

 

玄德等三人別了諸葛均與孔明同歸新野玄德待孔明如師食則同桌寢則同榻終日共論天下之事孔明曰曹操於冀州作玄武池以練水軍必有侵江南之意可密令人過江探聽虛實玄德從之使人往江東探聽

 

현덕 등 세 사람이 제갈균과 작별하고 공명과 더불어 신야로 돌아왔다. 현덕이 공명을 스승같이 대하여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자며 하루종일 천하의 일들을 함께 의논했다. 공명이 말하기를,

 

조조가 기주에서 현무지를 만들어 놓고 수군을 조련하니 틀림없이 강남을 침범할 뜻을 있습니다. 몰래 사람을 장강 너머로 보내 허실을 정탐해야 합니다.”

 

했다. 현덕이 그 말에 따라 사람을 강동으로 보내 정탐시켰다.

 

卻說孫權自孫策死後據住江東承父兄基業廣納賢士開賓館於吳會命顧雍張紘延接四方賓客連年以來你我相薦時有會稽闞澤字德潤彭城嚴畯字曼才沛縣薛綜字敬文汝陽程秉字德樞吳郡朱桓字休穆陸績字公紀吳人張溫字惠恕會稽淩統字公續烏程吾粲字孔休此數人皆至江東孫權敬禮甚厚又得良將數人乃汝南呂蒙字子明吳郡陸遜宇伯言琅琊徐盛字文向東郡潘璋字文珪廬江丁奉字承淵文武諸人共相輔佐由此江東稱得人之盛

 

한편, 손권이 손책의 사후부터 강동에 웅거하여 아버지와 형의 기업을 이어받아 널리 어진 선비를 받아들이고 오군과 회계 땅에 객관을 열어 고옹과 장굉에게 명해 사방의 빈객을 접견하게 했다. 해마다 너도나도 추천했다. 당시에 회계의 감택은 자가 덕윤이고, 팽성의 엄준은 자가 만재이며. 패현의 설종은 자가 경문이고, 여양의 정병은 자가 덕추이며, 오군의 주환은 자 휴목이고, 육적은 자가 공기이며, 오군 사람 장온은 자가 혜서이고, 회계의 능통은 자 공속이며, 오정의 오찬은 자 공휴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강동으로 오니, 손권이 그들을 공경하는 예의가 아주 후했다. 또 뛰어난 장수를 몇몇을 얻었다. 그들은 여양의 여몽은 자가 자명이고, 오군의 육손은 자가 백언이며, 낭야의 서성은 자가 문향이고, 동군의 반장은 자가 문규이며, 여강의 정봉은 자가 승연이다. 문관과 무관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보좌하니, 이로 말미암아 강동에서 인재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다.

 

建安七年曹操破袁紹遣使往江東命孫權遣子入朝隨駕權猶豫未決吳太夫人命周瑜張昭等面議張昭曰操欲令我遣子入朝是牽制諸侯之法也然若不令去恐其興兵下江東勢必危矣周瑜曰將軍承父兄遺業兼六郡之衆兵精糧足將士用命有何逼迫而欲送質於人質一入不得不與曹氏連和彼有命召不得不往如此則見制於人也不如勿遣徐觀其變別以良策禦之吳太夫人曰公瑾之言是也權遂從其言謝使者不遣子自此曹操有下江南之意但正值北方未寧無暇南征

 

건안 7년에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사자를 강동에 보내어 손권에게 명해 그 아들을 입조시켜 임금을 모시라고 했다. 손권이 유예하고 결정하지 못했다. 오태부인이 주유와 장소 등을 마주하여 의논했다. 장소가 말하기를,

 

조조가 우리에게 아드님을 입조시키라 함은 바로 제후를 견제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만약 보내지 않으면 그가 강동으로 출병해서 형세가 필시 위태로울까 걱정입니다.”

 

하니, 주유가 말하기를,

 

장군(손권)께서 부형의 유업을 이어받아 6군의 사람들을 아울러 거느려서 병사는 정예하고 식량은 넉넉하며 장사들은 명령을 받듭니다. 어째서 핍박을 받아 인질을 남에게 보내야겠습니까? 인질을 보내면 조씨와 동맹하지 않을 수 없어 그가 부르면 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남에게 통제를 받습니다. 인질을 보내지 말고 천천히 그 변화를 살펴 따로 좋은 계책으로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했다. 오태부인이 말하기를,

 

공근(주유의 자)의 말씀이 옳소.”

 

하니, 손권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사자는 돌려보내고 아들은 보내지 않았다. 이때부터 조조가 강남을 정벌할 마음을 가졌다. 다만 북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남쪽을 정벌할 틈이 없었다.

 

建安八年十一月孫權引兵伐黃祖戰於大江之中祖軍敗績權部將淩操輕舟當先殺入夏口被黃祖部將甘寧一箭射死淩操子淩統時年方十五歲奮力往奪父屍而歸權見風色不利收軍還東吳卻說孫權弟孫翊爲丹陽太守翊性剛好酒醉後嘗鞭撻士卒丹陽督將媯覽郡丞戴員二人常有殺翊之心乃與翊從人邊洪結爲心腹共謀殺翊時諸將縣令皆集丹陽翊設宴相待翊妻徐氏美而慧極善蔔》,是日蔔一卦其象大凶勸翊勿出會客翊不從遂與衆大會

 

건안 811월에 손권이 병력을 이끌고 황조를 정벌하여 장강 가운데서 싸웠는데, 황조의 군대가 거듭 패했다. 손권의 부장 능조가 작고 빠른 배를 타고 앞장서 하구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황조의 부장 감녕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능조의 아들 능통이 당시 막 15세인데 힘을 떨쳐 나아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서 돌아왔다. 손권이 보니 정세의 변화가 불리하여 군사를 거두어 동오로 되돌아갔다. 한편, 손권의 아우 손익이 단양 태수가 되었는데, 손익은 강직하고 술을 좋아해서 취하면 일찍이 사졸들을 채찍으로 때렸다. 단양의 감독 장수 규람 과 군의 보좌관 대원 이 두 사람이 늘 손익을 죽일 마음을 먹고 결국 손익의 종인 변홍을 심복으로 삼아 함께 손익을 죽일 것을 도모했다. 당시 손익이 장수들과 현령들을 모두 단양에 소집하여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려 했다. 손익의 아내 서씨가 아름다운데다 지혜로웠고 주역 점을 아주 잘 쳤다. 그날 점괘가 몹시 흉해서 손익에게 외출하여 손님을 맞이하지 말 것을 권했다. 손익이 따르지 않고 끝내 사람들과 크게 모임을 가졌다.

 

至晚席散邊洪帶刀跟出門外即抽刀砍死孫翊媯覽戴員乃歸罪邊洪斬之於市二人乘勢擄翊家資侍妾媯覽見徐氏美貌乃謂之曰吾爲汝夫報仇汝當從我不從則死徐氏曰夫死未幾不忍便相從可待至晦日設祭除服然後成親未遲覽從之徐氏乃密召孫翊心腹舊將孫高傅嬰二人入府泣告曰先夫在日常言二公忠義今媯戴二賊謀殺我夫只歸罪邊洪將我家資童婢盡皆分去媯覽又欲強占妾身妾已詐許之以安其心二將軍可差人星夜報知吳侯一面設密計以圖二賊雪此仇辱生死銜恩

 

저녁이 되어 자리를 파하니, 변홍이 칼을 차고 문밖으로 따라나와 즉시 칼을 뽑아 손익을 베어 죽였다. 규람과 대원이 이에 죄를 변홍에게 뒤집어 씌워서 저잣거리에서 처형했다. 두 사람이 이 틈에 손익의 재산과 시첩들을 빼앗았다. 규람이 서씨의 미모를 보고 그녀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네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한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리라.”

 

하니, 서씨가 말하기를,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마 바로 따를 수는 없소. 그믐날을 기다려 제사를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 결혼을 해도 늦지 않소.”

 

했다. 규람이 그 말을 따랐다. 서씨가 이에 몰래 손익의 심복인 옛 장수 손고와 부영 두 사람을 부중으로 불러들여 눈물을 흘리며 고하기를,

 

남편이 살아 계실 적에 늘 두 분을 충의롭다고 하셨소. 이제 규람과 대원 두 도적놈이 제 남편을 죽일 것을 도모하고도 변홍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에 우리집 재산과 종들을 모조리 나눠 가졌소. 게다가 규람이 제 몸을 강제로 욕보이려 해서 제가 이미 거짓으로 허락하여 그놈을 안심시켰소. 두 장군께서 어서 사람을 보내 오후(손권)께 알리는 한편, 몰래 계책을 내어 두 도적놈을 도모하여 이 원수와 치욕을 갚아주신다면 죽어도 은혜를 잊지 않겠소!”

 

했다.

 

言畢再拜孫高傅嬰皆泣曰我等平日感府君恩遇今日所以不即死難者正欲爲複仇計耳夫人所命敢不效力於是密遣心腹使者往報孫權至晦日徐氏先召孫傅二人伏於密室幃幕之中然後設祭於堂上祭畢即除去孝服沐浴薰香濃妝豔裹言笑自若媯覽聞之甚喜至夜徐氏遺婢妾請覽入府設席堂中飲酒飲既醉徐氏乃邀覽入密室覽喜乘醉而入

 

(서씨는) 말을 마치고 재배했다. 손고와 부영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희가 평소 부군의 은혜를 크게 입었습니다. 이제 즉시 따라 죽지 못한 까닭은 오로지 원수를 갚고자 해서였습니다. 부인께서 명하시는데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이에 몰래 심복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알렸다. 그믐날에 이르러 서씨가 먼저 손고와 부영 두 사람을 불러 밀실의 휘장 속에 숨긴 뒤, 대청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고 즉시 상복을 벗고 목욕하고 향을 뿌려 진하게 화장해 꾸미는데 말하고 웃는 게 태연자약했다. 규람이 (소식을) 듣더니 아주 기뻐했다. 그날 밤 서씨가 비첩을 보내 규람을 부중으로 불렀다. 대청에 술자리를 차려 술을 마시고 취하자 서씨가 규람을 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규람이 기뻐하며 취한 채 들어갔다.

 

徐氏大呼曰傅二將軍何在二人即從幃幕中持刀躍出媯覽措手不及被傅嬰一刀砍倒在地孫高再複一刀登時殺死徐氏複傳請戴員赴宴員入府來至堂中亦被孫傅二將所殺一面使人誅戮二賊家小及其餘黨徐氏遂重穿孝服將媯覽戴員首級祭於孫翊靈前不一日孫權自領軍馬至丹陽見徐氏已殺媯戴二賊乃封孫高傅嬰爲牙門將令守丹陽取徐氏歸家養老江東人無不稱徐氏之德

 

서씨가 크게 외치기를,

 

손고, 부영 두 장군은 어디 계시오!”

 

하니, 두 사람이 즉시 휘장 뒤에서 칼을 들고 뛰어나왔다. 규람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부영이 한칼에 베어 쓰러뜨리고 손고가 한칼을 더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 서씨가 다시 대원을 연회에 불렀다. 대원이 부중에 들어와 대청에 이르러 역시 손, 부 두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편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두 도적의 식구와 잔당을 죽였다. 서씨가 다시 상복을 입고 규람과 대원의 벤 머리를 손익의 영전에 올려 제사지냈다. 하루가 안 되어서 손권이 몸소 군마를 거느리고 단양에 이르렀다. 그가 서씨가 이미 규람과 대원 두 도적을 죽인 것을 보고 손고와 부영을 아문장으로 삼아 단양을 지키게 하고 서씨를 귀가시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강동 사람치고 서씨의 덕을 칭송치 않는 이가 없었다.

 

後人有詩贊曰

 

才節雙全世所無

奸回一旦受摧鋤

庸臣從賊忠臣死

不及東吳女丈夫

 

뒷날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재주와 절개 모두 갖추기는 세상에 드문데,

간악한 무리가 하루아침에 제거되었구나.

용렬한 신하는 도적을 따르고 충신은 죽을 뿐이니,

동오의 여장부(女丈夫)를 따를 수가 없구나.”

 

하였다.

 

且說東吳各處山賊盡皆平複大江之中有戰船七千餘只孫權拜周瑜爲大都督總統江東水陸軍馬建安十二年冬十月權母吳太夫人病危召周瑜張昭二人至謂曰我本吳人幼亡父母與弟吳景徒居越中後嫁與孫氏生四子長子策生時吾夢月入懷後生次子權又夢日入懷蔔者雲夢日月入懷者其子大貴不幸策早喪今將江東基業付權望公等同心助之吾死不朽矣又囑權曰汝事子布公瑾以師傅之禮不可怠慢吾妹與我共嫁汝父則亦汝之母也吾死之後事吾妹如事我汝妹亦當恩養擇佳婿以嫁之言訖遂終孫權哀哭具喪葬之禮自不必說

 

한편, 동오 곳곳에서는 산적이 모두 평정되었다. 장강에 전선 7천여 척을 보유하고, 손권이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아 강동의 육군과 수군을 모두 거느리게 했다. 건안 12년 겨울 10월에 손권의 어머니 오태부인이 위독하여 주유와 장소 두 사람을 불러서 일러 말하기를,

 

나 오태부인은 어려서 부모를 잃어 동생 오경과 더불어 월 지방에 옮겨와 살게 됐소. 뒤에 손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네 아들을 낳았소. 맏아들 손책을 낳을 때 내 꿈에 달이 내품에 안겼소. 뒤에 차남 손권을 낳을 때는 또 꿈에 해가 들어와 안겼소. 점쟁이가 이르길, ‘꿈에 해와 달이 들어와 안김은 그 아들이 귀해질 조짐입니다.’라고 했소. 불행히 손책이 일찍 죽어서 지금 강동의 기업은 손권에게 넘어갔소. 바라건대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그를 도와준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소!”

 

하고, 다시 손권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자포(장소의 자)와 공근(주유의 자)을 사부의 예로써 섬기는데 태만해선 안 된다. 내 여동생은 나와 함께 네 부친께 시집왔으니 역시 네 모친이다. 내가 죽은 뒤 내 여동생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해라. 네 누이도 마땅히 사랑하고 보호하여 좋은 사위를 골라 시집보내어라.”

 

했다. 말을 마치고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손권이 슬프게 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음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至來年春孫權商議欲伐黃祖張昭曰居喪未及期年不可動兵周瑜曰報仇雪恨何待期年權猶豫未決適平北都尉呂蒙入見告權曰某把龍湫水口忽有黃祖部將甘寧來降某細詢之寧字興霸巴郡臨江人也頗通書史有氣力好遊俠嘗招合亡命縱橫於江湖之中腰懸銅鈴人聽鈴聲盡皆避之又嘗以西川錦作帆幔時人皆稱爲錦帆賊後悔前非改行從善引衆投劉表見表不能成事即欲來投東吳卻被黃祖留住在夏口

 

이듬해 봄이 되자 손권이 황조를 칠 것을 상의했다. 장소가 말하기를,

 

상을 입은 지 아직 1년이 안 되었으므로 출병은 불가합니다.”

 

하니, 주유가 말하기를,

 

원수를 갚는데 어찌 1년을 기다리겠습니까?”

 

했다. 손권이 유예하고 결정하지 못했다. 마침 평북도위 여몽이 들어와 뵙고 손권에게 고하기를,

 

제가 용추 입구를 지키는데 문득 황조의 부하장수 감녕이 귀순했습니다. 제가 자세히 물어보니 감녕의 자는 흥패이고 파군의 임강 사람입니다. 제법 경전과 역사에 통하고 기력이 있고 유협(의협심에서 나온 행동)을 좋아합니다. 그가 일찍이 도망자들을 모아 강호를 주름잡았습니다. 허리에 구리방울을 달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모두 피해 달아났습니다. 또한 서천의 비단으로 돛을 만들어 당시 사람들이 비단 돛을 단 도적이라 일컬었습니다. 그 뒤에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을 고쳐 착하게 살려고 무리를 이끌고 유표에게 귀순했습니다. 유표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즉시 동오로 넘어오려 했으나 황조에게 붙들려서 하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했다.

 

前東吳破祖時祖得甘寧之力救回夏口乃待寧甚薄都督蘇飛屢薦寧於祖祖曰寧乃劫江之賊豈可重用寧因此懷恨蘇飛知其意乃置酒邀寧到家謂之曰吾薦公數次奈主公不能用日月逾邁人生幾何宜自遠圖吾當保公爲邾縣長自作去就之計寧因此得過夏口欲投江東恐江東恨其救黃祖殺淩操之事某具言主公求賢若渴不記舊恨況各爲其主又何恨焉寧欣然引衆渡江來見主公乞鈞旨定奪

 

(여몽이 말하기를)예전에 동오가 황조를 격파하자 황조가 감녕의 힘으로 하구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몹시 박하게 대접했습니다. 도독 소비가 여러 번 감녕을 황조에게 추천했습니다만, 황조가 말하기를, ‘감녕은 강을 노략질하던 도적인데 어찌 중용하겠소?’라 했습니다. 감녕이 이에 한을 품었습니다. 소비가 그 뜻을 알아 술을 마련해 그를 집으로 불러 이르기를,‘내가 그대를 여러 번 천거했으나 어쩐 일인지 주공이 쓰지 않는구려. 세월이 지나가니 인생이 얼마나 되겠소. 마땅히 스스로 멀리를 도모하시오. 내가 그대를 악현의 장으로 삼을테니 스스로 거취의 계획을 세우시오.’라고 했습니다. 감녕이 이에 하구를 벗어나게 돼서 강동으로 넘어오려 했으나 지난날 황조를 구하려고 능조를 죽인 것을 강동에서 원망할까 두려워합니다. 제가 그에게, 주공께서 어진 사람을 목마른 듯이 구하시고 옛 원한은 기억하지 않으며, 하물며 각각 그 주인을 위하여 한 일인데 어찌 원망하겠느냐고 갖추어 말했습니다. 감녕이 흔쾌히 무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서 주공을 만나뵐 것입니다. 아무쪼록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했다.

 

孫權大喜曰吾得興霸破黃祖必矣遂命呂蒙引甘寧入見參拜已畢權曰興霸來此大獲我心豈有記恨之理請無懷疑願教我以破黃祖之策寧曰今漢祚日危曹操終必篡竊南荊之地操所必爭也劉表無遠慮其子又愚劣不能承業傳基明公宜早圖之若遲則操先圖之矣今宜先取黃祖祖今年老昏邁務於貨利侵求吏民人心皆怨戰具不修軍無法律明公若往攻之其勢必破既破祖軍鼓行而西據楚關而圖巴霸業可定也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흥패(감녕의 자)를 얻었으니 반드시 황조를 격파하겠다.”

 

하고, 곧 여몽에게 명해 감녕을 데려오게 해서 만났다. 인사를 마쳐 손권이 말하기를,

 

흥패가 여기에 와서 내 마음을 빼앗았거늘 어찌 원한을 기억할 리 있겠소?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오. 내게 황조를 격파할 계책을 가르쳐주기 바라오.”

 

하니, 감녕이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지니 결국 조조가 찬탈할 게 분명합니다. 형주 남쪽 지역도 조조가 반드시 다툴 것입니다. 유표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그 아들들도 어리석고 못났으니 그 기반을 계승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공께서 어서 그곳을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늦으면 조조가 먼저 도모할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먼저 황조를 취하십시오. 황조는 이제 늙고 혼미해서 재물과 이익에 눈이 멀어 관리와 백성을 착취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합니다. 무기는 수리하지 않고 군대는 기강이 없습니다. 명공께서 쳐들어가시면 그 세력을 반드시 깨트릴 것입니다. 황조의 군사를 격파한 뒤 북을 울려 서쪽으로 가서 초관을 장악하고 파촉을 도모하시면 가히 패업을 이루실 것입니다.”

 

했다.

 

孫權曰此金玉之論也遂命周瑜爲大都督總水陸軍兵呂蒙爲前部先鋒董襲與甘寧爲副將權自領大軍十萬征討黃祖細作探知報至江夏黃祖急聚衆商議令蘇飛爲大將陳就鄧龍爲先鋒盡起江夏之兵迎敵陳就鄧龍各引一隊艨艟截住沔口艨艟上各設強弓硬弩千餘張將大索系定艨艟於水面上東吳兵至艨艟上鼓響弓弩齊發兵不敢進約退數裏水面甘寧謂董襲曰事已至此不得不進乃選小船百餘只每船用精兵五十人二十人撐船三十人各披衣甲手執鋼刀不避矢石直至艨艟傍邊砍斷大索艨艟遂橫

 

손권이 말하기를,

 

이것은 금과 옥 같은 이야기요!”

 

하고, 마침내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아 수륙의 군사를 모두 거느리게 하고, 여몽을 선봉으로 삼았다. 동습과 감녕을 부장으로 삼았다. 손권이 스스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조를 토벌하러 갔다. 세작이 탐지하여 강하에 보고했다. 황조가 급히 무리를 모아 상의하여 소비를 대장으로, 진취와 등룡을 선봉으로 삼아 강하의 병력을 총동원해 대적했다. 진취와 등룡이 각각 한 무리의 전선을 이끌고 면구에 정박하고 전선마다 강한 활과 쇠뇌를 1천여 장씩 배치하고 큰 밧줄로 전선들을 물 위에 묶었다. 동오의 군대가 이르자 전선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활과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어 동오의 병사들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물 위에서 몇리를 물러나려 했다. 감녕이 동습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됐으니 전진하지 않을 수 없소.”

 

하고, 이에 작은 배 1백여 척을 골라 배마다 정병 50인을 태우고, 20인은 노를 젓고 30인은 갑옷을 입고 강철 칼을 들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곧장 전선에 접근해 큰 밧줄을 끊으니, 마침내 전선들이 뒤엉켰다.

 

甘寧飛上艨艟將鄧龍砍死陳就棄船而走呂蒙見了跳下小船自舉櫓棹直入船隊放火燒船陳就急待上岸呂蒙舍命趕到跟前當胸一刀砍翻比及蘇飛引軍於岸上接應時東吳諸將一齊上岸勢不可當祖軍大敗蘇飛落荒而走正遇東吳大將潘璋兩馬相交戰不數合被璋生擒過去徑至船中來見孫權權命左右以檻車囚之待活捉黃祖一並誅戮催動三軍不分晝夜攻打夏口正是只因不用錦帆賊至令沖開大索船

 

감녕이 전선 위로 날 듯이 올라가 등룡을 베어죽였다. 진취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여몽이 보더니 작은 배로 뛰어내려서 스스로 노를 저어 적의 선단으로 돌입해서 적선에 불을 질었다. 진취가 급히 강둑에 오르지만 여몽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쫓아가서 한칼에 가슴을 찔러 거꾸러뜨렸다. 소비가 군사를 이끌고 강둑에서 맞서지만 오군의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상륙하여 막아내지 못했다. 황조의 군사가 대패하고 소비가 큰길을 버리고 들로 도망치다가 바로 동오의 대장 반장을 맞닥뜨렸다. 둘이 맞붙어 몇합 싸우지 않아서 반장이 사로잡아서 배 위로 끌고가 손권에게 보였다. 손권이 좌우에 명해 함거에 가두게 하고 황조를 사로잡기를 기다려 함께 처형하려 했다. 3군을 재촉하여 밤낮없이 하구를 공격했다. 이야말로, 오직 비단 돛을 단 도적을 쓰지 않더니 결국 큰 밧줄로 묶은 선단을 공격하게 했구나.

 

未知黃祖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황조의 승부가 어찌될 지 모르겠구나. 다음회의 이야기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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