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현서당 2024. 10. 5. 07:55



秋霞翦作淺深紅,
靑女多情巧不窮.
點點欲燒殘照外,
層層如畵亂山中.
數行書字悲心事,
幾个牽愁落晩風.
莫向秋深怨零落,
東君應又綴殘叢.


추하전작천심홍, 청녀다정교불궁.
점점욕소잔조외, 층층여화난산중.
수항서자비심사, 기개견수낙만풍.
막향추심원영락, 동군응우철잔총.





가을은 노을을 잘라내어
옅은 색 짙은 색 붉은 천을 만들고,
서슬 퍼런 서리는 웬 정이 많은지
끝도 없이 솜씨를 보인다.


저무는 낙조 아래로
점점이 불에 타오르고,
이 산 저 산 속에
층층이 화폭이 펼쳐진다.


몇 줄의 사연은
심사를 구슬프게 만들며,
이런저런 시름 끌고
저녁 바람에 떨어진다.


깊어가는 가을 향해
조락을 원망하지 말자.
봄바람은 또 시든 풀숲에서
풀을 엮고 있을 게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진정한 가을 마니아였다. 그의 삶은 청산(靑山)을 떠도는 비애(悲哀)로 점철(點綴)되어 있었지만, 그에게 가을은 단순한 우수(憂愁)의 계절이 아니었다. 가을 단풍(丹楓)이 나타나면 그의 마음은 늘 설렜고, 그 단풍잎 하나하나에 시선을 두고 나서야 비로소 산을 조망(眺望)하며 감탄사(感歎詞)를 내뱉었다. 그걸 시()로 풀어낸 것도 모자라, 그는 언제나 말하곤 했다. “형언(形言)할 수 없는 단풍(丹楓)의 아름다움은 마치 가을 하늘을 수놓은 노을[]의 변신 같고, 서리[]의 장난 같다.” ... 서리가 장난을 친다니? 한마디로 서리의 솜씨가 아주 훌륭해서 나뭇잎을 ''하고 건드린다는 것 아닐까?

김시습(金時習)은 항상 노을이 짙어지고 서리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마음을 채워나갔다. 그의 시()에 따르면, 가을은 마치 노을을 잘라서 옅은 색과 짙은 색의 붉은 천을 만드는 것 같고, 그걸 보면 ", 저거 서리의 솜씨가 대단하네?"라고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서리가 이렇게 정()이 많을까? 김시습(金時習)은 서리가 나뭇잎마다 끝도 없이 솜씨를 보이며 무한한 예술을 펼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김시습(金時習)의 마음은 단풍잎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며, 나뭇잎마다 숨겨진 사연(事緣)을 읽는다. 그러다 낙엽(落葉)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사연을 듣는 듯한 구슬픈 심정이 된다. 뭐랄까, 그 낙엽들이 마치 김시습(金時習)이 못 다한 이야기를 바람에 흘려 보내는 느낌이랄까? 심사(心思)가 몹시 복잡해지면서도,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으니, 바로 "조락(凋落)에 너무 집착(執着)하지 말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이 왔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자. 왜냐면 봄바람(春風)은 이미 시든 풀숲에서 풀을 엮으며 생명을 키우고 있을 테니까!" 와우, 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지혜로운 생각인가! 단순한 가을 감성 시인(詩人)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를 깨달은 철학자(金時習)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가을의 낙조(落照) 아래 점점이 불처럼 타오르는 단풍(丹楓)들 사이에서, 김시습(金時習)은 가을이 주는 비애(悲哀)를 넘어선 것이다. 그는 이 산 저 산에 펼쳐진 화폭(畫幅)을 바라보며, 단순히 ', 낙엽(落葉)이 지네... 겨울이 오겠구나...'하고 슬퍼하는 대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봄은 다시 올 것이고, 그때면 이 풀들도 다시 푸르게 피어나겠지!'라고 외친 것이다.

김시습(金時習)은 그저 시적(詩的) 감상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현자(賢者)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그를 따라 가을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낙엽(落葉)이 떨어지면 "그래, 겨울이 오지만 다시 봄이 오겠지!" 하며 긍정적으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김시습(金時習)은 가을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단풍(丹楓) 보고 설레며, 낙엽(落葉)에서 슬픈 사연(事緣)을 읽으면서도, 그 사연 속에서 희망(希望)을 발견하는 그 마음. 진짜 낭만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그러니 이번 가을엔, 김시습(金時習)의 시()를 떠올리며, 노을과 단풍, 서리의 장난을 마음껏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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