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리더이야기/4. 리더의 자질- 리더가 갖추어야 할 품성

6. 군신의 의리와 예를 지키는 위대한 재상 왕도(王導) [君臣有義 군신유의]

진현서당 2024. 10. 1. 22:04

임금 군, 신하 신, 있을 유, 의로울 의

 

왕도(王導)는 자는 무홍(茂弘)이고 위·(魏晉) 시대의 낭야왕(琅琊王)씨로 불리는 명문 집안 출신이다. ()나라 초기의 세 군주를 보좌한 동진(東晉)의 개국 공신이다. ()나라 명재상 방현령(房玄齡) 등은 진서(晉書)’에서 왕도(王導)관중(管仲)처럼 인덕(仁德)을 지녀 소국(小國)을 도울 수 있고, 제갈공명(諸葛孔明)처럼 인의(仁義)를 실천해 신방(新邦: 새로 선 나라)을 보좌할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 왕도(王導)가 세 군주를 모시며 재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행(德行) 덕분이었다.

 

인의를 실천해 군신 관계를 바로잡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왕도(王導)는 일찍이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진나라 원제)와 절친한 친구였다. 왕도(王導)는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마예(司馬睿)를 진심으로 보좌해 조정의 기강을 부흥시키려 했고 사마예(司馬睿)도 그를 매우 신임했다.

 

당시 왕도(王導)는 종종 사마예(司馬睿)에게 자신을 단속하고 예절을 지키며 현인을 포섭해 일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사마예(司馬睿)는 일찍이 소하(蕭何)가 유방(劉邦)을 보좌해 한()나라를 건국한 것을 비유해 왕도(王導)에게 경은 나의 소하(蕭何)라고 했다. 이에 왕도(王導)는 대답했다. “()나라 황제가 무도해 간교한 자들이 백성을 업신여기니 난세를 싫어한 백성들이 유방(劉邦)을 따랐고, 유방(劉邦)은 덕정(德政)을 베풀며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았습니다. 조위(曹魏: 조조가 세운 위나라) 이래 관리와 명문대가(名門大家)는 서로 사치를 겨루고, 양정예교(良政禮敎)는 점차 쇠망해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없으며, 많은 관리가 향락에 빠져 결국 사회의 도덕 기풍을 해쳤습니다. 그러나 비극태래(否極泰來, 쇠태의 시기가 지나면 부흥의 시기가 온다는 뜻)는 천지간의 순리입니다. 대왕께서 개세(開世)의 공훈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시려면 관중(管仲), 악의(樂毅)와 같은 현인들이 적시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저와 같은 평범한 신하들과 비교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만약 대왕께서 널리 선량한 인재를 고를 수 있다면 천하가 안정될 것입니다.” 그 후 사마예(司馬睿)는 왕도(王導)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점차 남북 학자들의 공동 추대를 받았다. 왕도(王導)의 덕은 군신의 의리와 예의를 지키고 교만하지 않으며, 덕정(德政)을 이상으로 삼고 왕이 자신보다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격려한 것이었다.

 

진서(晉書)’에는 왕도(王導)가 군신의 예를 지킨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마예(司馬睿)가 제왕에 올랐을 때 백관들이 한쪽에 배석하자 사마예(司馬睿)는 왕도를 존경해 어좌(御座)로 올라와 앉으라고 명했다. 왕도(王導)는 여러 번 사양한 뒤 사마예(司馬睿)에게 말했다. “만약 태양이 내려와 만물과 같이 있는다면 창생(蒼生)이 어떻게 우러러보며 혜택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마예(司馬睿)는 그의 뜻에 따랐다. 또 한번은 진()나라 명제(明帝) 사마소(司馬紹)가 즉위해 왕도(王導)가 보좌할 때, 왕도(王導)의 사촌형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明帝)는 왕돈(王敦)을 토벌할 때 왕도(王導)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양주자사(揚州刺史)를 겸임하게 했다. 왕돈(王敦)의 반란을 평정한 후 명제(明帝)는 하사품을 내리는 외에 왕도(王導)를 예우하려 했다. 궁궐에 들어갈 때 칼과 신발을 착용할 수 있고 작은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며, 왕을 만날 때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역사적으로 당나라의 위정(魏征)과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이 이런 영광을 누렸음]. 하지만 왕도(王導)는 사양했다.

 

역대 왕조의 개국 원로들은 술자리에서 병권을 빼앗기고 새를 다 잡자 활을 거두듯이 토사구팽(兔死狗烹)을 당했다. 왕도(王導)3대 군주를 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신의 의리(義理)와 예의(禮義)를 지키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사람, 왕도(王導)

 

완벽한 사람은 없다. 실수했을 때 책임을 지고 부끄러움을 아는 미덕을 갖춰야 한다. 태산태수(太山太守) 서감(徐龕)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예(司馬睿)는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고 왕도(王導)는 태자 좌위 양감(羊鑒)을 추천했다. 나중에 양감(羊鑒)이 전투에서 패해 처벌을 받게 되자 왕도(王導)는 상소를 올렸다. “양감(羊鑒)이 겁에 질려 패배했으니 그를 천거한 저 역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정사를 책임지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기에 삼군의 패배에 책임이 있습니다. 조정의 윤리를 엄중히 하기 위해 저를 좌천시켜 주십시오.” 하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실패하면 일반적으로 책임을 서로 미루거나 회피한다. 자신의 실수를 직시하지 못하면 배우고 개선할 수 없다. 왕도(王導)는 패전한 장수가 아니고 패장(敗將)을 추천한 사람이었음에도 기꺼이 책임을 지며 모범을 보였다.

 

도덕교육 강조, 올바른 윤리 확립

 

왕도(王導)의 정치적 공헌 중 하나는 황제에게 학교를 설립해 바른 인륜과 도덕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도록 조언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학교가 황폐해진 위진(魏晉) 시대에 왕도(王導)는 사회 풍조의 근본은 올바른 인륜을 세우는 데 있고, 올바른 인륜의 핵심은 학교 설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학교를 세우면 오례(五禮)를 제창할 수 있고, 도덕과 예절에 통할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고 정도(正道)를 지키면 가족관계가 화목해지고 군신(君臣)의 의리가 더욱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경(易經)’에서 말하는 정가이천하정(正家而天下定-집안을 바로잡아야 천하가 안정된다)’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쳐서 좋은 도덕적 가치가 그들 삶에 통합되고 습관되며 성품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죄악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좋은 인품을 기른 뒤 적절한 직위를 부여해 국가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왕의 아들도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존귀한 지위를 부여받기 전에 도덕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선비들이 존경받는 이유가 그들의 덕행 때문임을 알게 되면 백성들도 끊임없이 자기완성을 추구해 소박한 덕행을 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화(敎化)의 효과입니다.” 사마예(司馬睿)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임금의 덕행(德行)과 학교 교육은 관리들의 통치와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쳐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결정짓는다. 현대 조직도 마찬가지다. 조직 풍조의 형성은 조직 고위층의 언행과 교육에서 비롯된다.

 

검소한 삶, 그리고 그의 마지막

 

왕도(王導)는 검소하고 욕심이 없어 집에 여분의 식량이 없고 옷차림도 간단했다. 황제가 알고 베 1만 필을 하사했다. 왕도(王導)의 건강이 좋지 않아 조회에 참석하지 못하자 황제는 그의 집에 찾아가 술자리를 마련해 즐겁게 해주었다.

 

함강(咸康) 5, 왕도(王導)64세 나이로 병사했다. 황제는 황궁에서 3일간 그를 위한 장례식을 거행했는데, ()나라의 대사마 광(霍光)과 서진(西晉) 안평헌왕(安平獻王) 사마부(司馬孚)를 본떠 장례식을 치렀다. 발인할 때 황제는 9대의 예거(禮車)를 주고 제왕의 장례용 의장과 악대, 그리고 백 명의 무사로 구성된 수행원이 호위하게 했는데 이는 과거의 다른 재상의 장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송서(宋書)’에 따르면, 동진(東晉)에게 나라를 선양(禪讓)받아 유송(劉宋)을 세운 개국황제 무제(武帝)는 동진(東晉)의 명재상 후손에 대한 봉작(封爵) 조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라의 봉작제도는 이제 바뀌었지만, 왕도(王導) 등 동진(東晉)의 어진 신하들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였으며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그 인의와 도덕은 영구하도다.” 그래서 왕도(王導)는 시흥(始興)현의 공작(公爵)이 되어 천 가문을 거느리게 됐고 이로써 왕도(王導)의 후손들은 여전히 봉지와 봉급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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