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용의 눈물: 태종우 (太宗雨)
太 클 태, 宗 마루 종, 雨 비 우
태종(太宗)은 조선(朝鮮)의 왕이 된 후, 국가 행정 체계를 철저하게 정비하며 "내가 이 나라의 진짜 왕이다!"라고 외친 듯했다. 그는 6조(六曹) 중심의 행정 체계를 완성하여 자신의 국정 장악력을 극대화했고, 오늘날의 지방제도 근간인 8도(八道) 체제를 정비하며 “도(道)를 잘 나눠야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얼(庶孽)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서얼차대법(庶孽差待法)을 제정하며 “아, 서얼(庶孼)은 출세할 수 없지!”라는 서얼(庶孼)의 탄식을 유발했다.
그리고 호패법(號牌法)을 통해 인구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양전법(量田法)을 정비해 세금(稅金)도 제대로 걷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말하자면, 태종(太宗)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본 운영 매뉴얼을 만들며 "이대로 운영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믿음을 가진 셈이다. 이런 제도들은 이후 조선(朝鮮)의 운영의 근간이 되었으니, 그는 훗날 “내가 그 밑그림을 그렸다고!”라고 자랑할 만한 일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이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태종(太宗)은 왕권에 도전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기 시작했다. 사병혁파(私兵革罷)에 반대하던 영의정(領議政) 이거이(李居易)는 태종(太宗)의 눈에 딱 걸렸다. 태종(太宗)은 그를 제거하며 "사병(私兵) 가지고 나한테 덤비지 마!"라고 외쳤고, 당대(當代)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이거이(李居易)는 사라졌다.
그리고 왕위를 오르게 해준 고마운 사람,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집안도 그냥 두지 않았다. 민씨(閔氏)의 형제들이 세자(世子)를 끼고 권력을 휘두르자 태종(太宗)은 그들마저도 모두 제거하며 “가족도 권력 앞에서는 소용없어!”라는 냉혈한(冷血漢)의 모습을 보였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肅淸)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태종(太宗)의 개혁(改革)과 숙청(肅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왕"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가족과 국가를 위한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418년, 태종(太宗)은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 즉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태종(太宗)은 비장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두 달 전에, 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시키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世子)로 삼았던 것이다.
신하들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잘못을 들추어내며 폐위를 논했을 때, 태종(太宗)은 마치 "너희가 나보다 더 무섭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결단을 내렸고, 실록(實錄)은 그가 통곡했다고 기록한다. 그가 통곡하며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는 기록은, 아무리 냉혈한 왕이라도 아비의 마음을 감출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냉철함은 계속 이어졌다.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태종(太宗)은 상왕(上王)으로서 국가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죽기 직전,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궁궐 후원에서 단(壇)을 쌓고 하늘에 기도하며 “옥황상제(玉皇上帝)님, 제발 비 좀 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기도 끝에 비가 내렸고, 태종(太宗)이 죽은 후에도 그의 기일에 비가 내리면 백성들은 그것을 '태종우(太宗雨)'라며 감사했다. 아마도 태종(太宗)은 "내 눈물이 비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했을지도 모른다.
사극(史劇) ‘용의 눈물’에서 보여준 것처럼, 태종(太宗)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때로는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마치 백성을 위한 마지막 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흘렸던 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눈물을 흘린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태종(太宗)은 피를 흘리며 국가를 다스렸지만, 그가 남긴 제도와 정책은 이후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운영에 큰 기초가 되었다. 그가 세운 법과 규정들은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백성들은 "그래도 우리 태종(太宗)이 나라 잘 다스렸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태종(太宗)은 조선왕조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서 역사에 길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