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보이국사(報以國士)
남을 국사(國士)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國士)로서 待接(대접)받는다는 말. 예양(豫讓)이 한 말.
報 : 갚을 보
以 : 써 이
國 : 나라 국
士 : 선비 사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예양(豫讓)은 진(晉)나라 출신의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겼지만, 이 두 사람은 예양(豫讓)을 그다지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예양(豫讓)도 처음엔 열심히 섬겼으나, 결국 마음이 상한 나머지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한 예양(豫讓)은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을 섬기기로 했다.
지백(智伯)은 당대 진(晉)나라 육경(六卿) 중 하나로, 한 나라의 실권자였지만 성격은 다소 교만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백(智伯)은 예양(豫讓)을 극진히 대접했다. 예양(豫讓)은 그가 자신을 "국사(國士)"로 예우한 것에 감동받아, 지백(智伯)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다. 그야말로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예양(豫讓)은 지백(智伯)의 곁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지백(智伯)은 조양자(趙襄子)를 공격하려다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이때 조양자(趙襄子)는 한(韓), 위(魏)와 연합하여 지백(智伯)을 무찌르고, 결국 지백(智伯)은 멸망하고 만다. 지백(智伯)의 몰락은 곧 예양(豫讓)의 분노로 이어졌다. 조양자(趙襄子)는 지백(智伯)을 증오하여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예양(豫讓)의 마음은 더욱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디 조양자(趙襄子)를 그냥 두고 보나 봐라!" 예양(豫讓)은 복수를 다짐하며 행동에 나섰다. 그는 스스로 죄인(罪人)으로 가장하고, 비수(匕首)를 품고 조양자(趙襄子)의 변소에 숨어들어 그를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변소에서 칼을 들고 기다리다가, 들키고 만 것이다. 조양자(趙襄子)는 예양(豫讓)의 용기와 충성심을 보고 "의인(義人)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를 석방해준다. "이 사람, 뭐 진짜 충성심 하나는 대단하네."라고 생각한 조양자(趙襄子)는 그를 풀어주면서도, 예양(豫讓)의 다음 계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양(豫讓)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몸에 옻칠을 하여 나환자처럼 변장하고, 벙어리와 거지의 행세까지 하며 조양자(趙襄子)를 다시 노렸다. 이번엔 다리 밑에 숨어서 조양자(趙襄子)가 외출할 때 찌르려 했으나, 하필 그 순간 말이 놀라며 예양(豫讓)의 계획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조양자(趙襄子)는 예양(豫讓)을 다시 붙잡고 호되게 꾸짖으며 물었다.
"아니,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도 섬겼으면서 그들이 지백(智伯)에게 멸망당할 때는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지백(智伯)을 위해 이리 끈질기게 복수하려 하느냐?"
예양(豫讓)은 이에 담담하게 답했다.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는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했으니 저도 그에 맞게 처신했습니다. 하지만 지백(智伯)은 저를 국사(國士)로 예우했기에, 그에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報以國士)."
조양자(趙襄子)는 예양(豫讓)의 진심을 알아차렸고, 더 이상 그를 용서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그냥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예양(豫讓)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조군(趙君), 저에게 당신의 옷을 주십시오. 그 옷을 칼로 3번 친 뒤, 지하에서 지백(智伯)에게 보고하고 싶습니다." 조양자(趙襄子)는 이를 허락했고, 예양(豫讓)은 조양자(趙襄子)의 옷을 세 번 칼로 치고는 태연하게 자결했다.
그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 "지하에서 지백에게 보고하겠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자결이 아니었다. 그가 섬기던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킨 결과였다. 그의 결단과 행동을 본 조(趙)나라의 지사(志士)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울었다고 한다.
예양(豫讓)의 이야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인물들의 복잡한 충성과 의리를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충성심은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예우해준 주군에 대한 보답이었다. 예양(豫讓)은 자신을 소홀히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대우해주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바쳐 보답하는 인물이었다.
사실, 현대적 관점에서는 그가 좀 과한 면이 없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아니, 변소에 숨어서 암살을 시도하다니?" 또는 "옻칠을 하고 나환자처럼 변장까지 해가며?"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하지만 그만큼 예양(豫讓)에게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예양(豫讓)의 이야기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고사성어를 대표하는 사례로도 자주 언급된다. 그가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떠나 지백(智伯)을 섬긴 이유는 자신을 단순히 "사람"으로 보느냐, 아니면 "국사(國士)"로 보느냐의 차이였다. 결국 예양(豫讓)은 지백(智伯)에게 받은 예우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그의 이야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내내 회자되며 의인(義人)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과연, 그때의 눈물은 예양(豫讓)의 충성심에 감동해서 흘린 눈물일까, 아니면 그의 무모한 계획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