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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독 대신 대세를 읽다: 제갈량의 공부법(觀其大略 관기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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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관, 그 기, 큰 대, 간략할 략

 

제갈량(諸葛亮)의 독서법은 조금 특별했다. 친구들인 최주평(崔州平), 석광원(石廣元), 서원직(徐元直), 맹공위(孟公威)와 함께 형주(荊州)에서 공부할 때,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정독(精讀)과 숙독(熟讀)을 반복했지만, 제갈량(諸葛亮)은 그저 "대략만(大略)" 살폈다. 이때의 '대략(大略)'은 대충이 아닌, 가장 중요한 핵심과 요점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으며, 공부에 대한 방식도 남달랐다. 그가 말하길, "세 분은 벼슬에 나가면 자사(刺史)나 군수(郡守) 정도는 하겠소,"라고 했고,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제갈량(諸葛亮)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 일화(逸話)는 오늘날의 과학적 독서법(讀書法)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책을 단순히 정독하기보다, 실질(實質)과 요점(要點)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제갈량(諸葛亮)이 강조한 '관기대략(觀其大略)'은 주변 상황을 살피고 큰 흐름을 읽는 능력을 기르는 방법으로, 그 포부가 크고 식견(識見)을 갖춘 사람일수록 유용한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략 독서법' 덕분인지, 제갈량은 후에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에 비견될 정도의 인물이 되었고, 결국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자사(刺史)나 군수(郡守) 정도나 하겠지"라고 한마디 툭 던진 것이다. 과연 제갈량(諸葛亮)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최주평(崔州平) : 후한(後漢) 말기 제갈량(諸葛亮)의 친구로, 남양(南陽)에 은거했다. 건안(建安) 초에 제갈량, 석광원(石廣元), 서서(徐庶) 등과 함께 공부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에 비견했는데, 세상 사람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만 이 말을 신뢰했다. 그의 추천으로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하게 된다.

 

*석광원(石廣元) : 후한(後漢) 말기 남양(南陽) 땅에 살았다. 난세에 세상에 나오기를 꺼려 은거하면서 술과 글로 일생을 보냈다.

 

*서원직(徐元直) : 자는 원직(元直)이고, 원래 이름은 서복(徐福)이다. 젊을 때는 협객을 동경하여 검술을 익히기도 했으나 후에 학문에 정진하기로 했다. 후한(後漢) 말기에 혼란을 피해 형주(荊州)로 이주했는데, 이 무렵 사마휘(司馬徽), 제갈량, 최주평 등과 교유했다. 유비가 신야(新野)에 진을 쳤을 때 찾아가 귀순하여 신임을 얻었는데, 유비는 그의 도움을 받아 조조(曹操) 군대의 대장 조인(曹仁)을 잇따라 격파하고 번성(樊城)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서서(徐庶)의 지략을 흠모하던 조조가 서서의 노모를 속여 허창(許昌)으로 오게 한 다음 볼모로 잡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 허창으로 오도록 유인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았던 서서(徐庶)는 노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유비와 눈물로 작별하고 조조에게 투항했고, 이때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했다.

 

*맹공위(孟公威) : AD 194년 무렵 양양(襄陽)으로 피난을 왔다. 최주평, 서원직, 석광원, 제갈량과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맹공위는 제갈량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도 나중에 위()에 출사하여 양주자사(凉州刺史)가 되었으며, 뛰어난 업적으로 관직이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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